금성[수성]나씨

[스크랩] 금성나씨(錦城羅氏)

미르뫼 2013. 5. 31. 16:08

 

금성나씨(錦城羅氏)

 

【시조】나총례(羅聰禮)

【인구】40,493(2000년 현재)

【주요파】▲장파  ▲청백리공파  ▲광우공파(수성나씨)  ▲한림공파  ▲죽헌공파  

 

  나성(羅姓)은 본시 축융씨의 후예인 광정공이 주나라 무왕 때 공을 세워 나국(羅國)에 봉해지면서 득성하게 되었고 한고조때 주공이 예장땅 영주가 되면서 예장나씨(豫章羅氏)가 되었으며 중국에서는 예장나씨 일본 <一本>이다.

  당태종때 상서좌복야로 있던 나지강(羅至强)공이 고구려 정벌론을 반대하고 망명길에 올라 황해를 건너 발라현(현 나주지방)에 배를 댔으며 그후 신라조정에 출사하여 좌승상에 이르렀고 자손들은 십여대가 대대로 나주지방에 거주하였다.  

지강공은 우리나라에 정착한 최초의 시조이나 그 후 후손이 10여대(약 200여년) 동안 통일신라에 벼슬을 하고 살았지만 당시에 족보가 없어 댓수가 명확하지 못하였기 때문에 왕건을 도와 고려를 개국한  삼한공신 대광 금성부원군 나총례(羅聰禮)공을 시조 하였다.  

고려시대 총례공 후손들은 십이봉군(十二封君), 칠대광(七大匡), 삼정승(三政丞), 삼상서(三尙書), 사유현(四儒賢), 오대장군(五大將軍)을 배출하여 고려시대 조정에 출사를 많이한 최고의 명문 문중이었다. 

고려 역사를 수놓은  위공을 세운인물로 충문공 나총례, 금성군 나유, 양절공 나익희, 송은 나계종 4인이 경기도 파주시 고려통일대전에 배향되었다.

  그러나 조선시대 초기 총례공 후손들은 두 임금을 섬길 수 없다 하여 조정에 출사를 하지 않았다.

 송재공(나세찬:19세손)은 대사헌에 오르고 이퇴계, 유미암 선생등과 호당에서 독서 하였으며 탁영시(擢英詩)에 장원하여 당대 문명(文名)을 떨쳤다. 이조 중기의 도학자이고 나주의 송재사(松齋祠)에 제향되었으며 저서로는 <송재유고>가 있고 시호는 희민(僖敏)이다.

☆ 임진왜란 당시 거북선을 제작하여 왜군 섬멸에 혁혁한 공을 세운 나대용(금성나씨 21세손) 장군님의 애국 충절을 기리고 그 유훈을 되새기고자 매년 4월 21일 과학의날에 나주 소충사에서 진해 해군 군악대의 연주에 맞추어 뜻깊은 추모 행사(나주시청 주최)를 거행한다.

  1974년 나대용장군 기념사업회가 조직된 후 기적비 건립에 이어 1977년 생가 묘소등 유적지 일대를 전남지방문화재 제26호로 지정받고 국립사우 소충사(昭忠祠)를 세워 영정과 위패를 모시고 있다.

  또 공의 역사적 공적을 기리기 위해 1999년 6월 건조된 제8호 잠수함을 나대용함(羅大用艦)이라 명명하고 나대용함대를 편성 현재 국토방위를 위해 활동 중에 있다.

실로 나대용장군은 거북선 제작의 창조자로 16세기 역사상 유래를 찾아 볼 수 없을 탁월한 과학자요 조선(造船)기술자로 평가되니 우리민족의 영원한 자랑이라 아니 할 수 없다.

 

 나대용(금성나씨)장군이 제작하여 임진왜란에 참전했던 거북선 모형

 

 1919년 삼일운동때 민족대표 33인에 나용환, 나인협 포함되었고 두 분 모두 항일투쟁 전개중 일본경찰에 체포되어 옥고를 치루었으며 독립운동에 큰 기여를 하였다.

 독립운동가 나석주는 황해도 재령 출신이며 23세 때 만주로 망명하여 신흥무관학교에서 4년간 군사훈련을 받은 뒤 귀국, 항일공작원으로 일했다. 1926년 김창숙 등과 모의하여 일본의 식민회사인 동양척식주식회사에 폭탄을 던진다. 그리고 추격하는 일본 경찰과 접전을 벌이다 자결했다. 

☆ 나월환장군은 1939년 중국에서 한국청년전지공작대장에 취임 항일투쟁을 위해 청년동지들을 훈련시켰고 일선공작과 연극등을 통한 수익금으로 광복군의 군수품 조달에 기여를 했으며 1941년에는 광복군 제5지대장으로 항일투쟁에 큰 기여를 했다.

 나도향으로 알려진 소설가 나경손은 홍사용. 현진건. 이상화. 박종화 등과 함께 문예동인지 "백조"를 발간했다. 나도향은 특히 우리나라 신문학 사상 최초로 낭만주의 운동을 일으킨다. "뽕", "물레방아", "벙어리 삼용" 등이 유명하다. 소년시절부터 천재작가라는 평을 받았으나 25세로 요절했다.

 한국영화의 개척자인 나운규는 1926년 영화계에 등장 "아리랑" 시나리오를 쓰고 출연, 감독까지 담당 천재적 재능을 발휘하면서 한국영화에 금자탑을 세웠다. "벙어리 삼룡이" 등 15편을 제작, 감독, 주연을 했으며 "흙과 백" 등 26편의 영화에 관여했다.

 

출처 : 금성 나 씨 대종회
글쓴이 : 나진 원글보기
메모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