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성[수성]나씨

[스크랩] 시조 및 본관의 유래(참고자료)

미르뫼 2013. 5. 31. 16:16

금성나씨(錦城羅氏)

시조 및 본관의 유래(始祖 本貫由來)

    금성 나씨 의 시조(始祖)는 고려 초에 삼한벽상일등공신(三韓壁上一等功臣)에 오른 나총례 (羅聰禮)이며, 그의 아들 은고(恩誥)가 자의대부(資義大夫)로 공빈승(貢賓丞)을 지내고 금산군(錦産君)에 봉해진 것을 시작으로 11세손에 이르기까지 3명이 대광(大匡)의 벼슬에 오르고 4명의 부원군(府院君)과 5명이 봉군(封君)되어 벌족(伐族)의 지위를 차지했다.

  한편 판호부사(判戶部事) 득황(得璜)의 아들 유(裕)는 고려 원종(元宗) 때 김방경(金方慶)과 함께 삼별초(三別抄)를 토평했고, 충렬왕조(忠烈王朝)에서는 변경에 침입한 거란(契丹)을 격퇴시켜 회원대장군(懷遠大將軍)의 호(號)를 받아 가문을 크게 일으켰다.

  고려 말엽에 주로 명성을 떨쳤던 금성 나씨는 금성군 (錦城君) 익희(益禧)의 손자 문규(文奎 : 상호군 영걸의 아들)가 충숙왕(忠肅王)때 문과에 급제하고 여러 관직을 거쳐 서해도 안렴사(西海道按廉使)로 나가 치적(治積)을 남겼으며, 상장군(上將軍) 수겸(守謙)의 9세손 계종(繼從)은 고려에서 예문관 제학(藝文館提學)을지

내다가 조선이 개국되자 벼슬을 버리고 향리(鄕里)로 돌아가 불사이군 (不事二君)의 충절(忠節)을 지켰다.

  조선 중종(中宗)과 명종대(明宗代)에 문명(文名)을 떨쳤던 세찬(世纘)은 문규(文奎)의 7세손으로 당대의 권신(權臣)인 김안로(金安老)의 간악함을 탄핵하다가 여러 차례 장류(杖流)당했으나, 김안로가 사사(賜死)되자 호당(湖當)에 뽑혀 사가독서 (賜暇讀書)를 한후 이조 참의(吏曹參議)를 거쳐 대사헌(大司憲)에 올랐다.

  세찬의 증손(曾孫) 무춘(茂春)도 광해군(光海君) 때 기개(氣槪)높은 학자(學者)로 명성을 떨쳤고, 학정(學正)으로 있을 때 폐모론 (廢母論)이 대두되자 검열(檢閱)로 있던 엄 성(嚴 惺)과 유생(儒生)들을 이끌고 이를 반대하는 상소를 올렸다가 파직당했다.

  그외 가문을 빛낸 인물(人物)로는 득황(得璜)의 13세손 치용(致用)이 임진왜란 때 향병(鄕兵)을 이끌고 이순신(李舜臣) 장군의 막하(幕下)로 들어가 노량해전(露梁海戰)에서 공(功)을 세우고 장렬하게 순절하였으며, 그의 사촌 대용(大用)은 거북선과 해선(海船)을 제작하는 데 공(功)을 세워 삼지창 (三枝槍 : 일명 당파창, 끝이 세 갈래로 갈라졌고 길이가 일곱 자 여섯 치임)과 청룡도 (靑龍刀)를 하사(下賜)받아 평양성(平壤城) 방어에 공(功)을 세운 승윤(承潤)과 함께 충절(忠節)의 가통  (家統)을 지켰다.

  1985년 경제기획원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면 금성 나씨(錦城羅氏)는 남한(南韓)에 총 9,490 가구, 39,903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출처 : 금성 나 씨 대종회
글쓴이 : 나형주소태동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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