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성[수성]나씨

[스크랩] 三 韓 功 臣 大 匡 錦 城 府 院 君 諡 忠 文 羅 公 聰 禮 史 蹟 之 碑

미르뫼 2013. 5. 31. 16:04

三 韓 功 臣 大 匡 錦 城 府 院 君

忠 文 羅 公 聰 禮 史 蹟 之 碑

 

  공(公)의 휘(諱)는 총례(聰禮)이고 금성나씨(錦城羅氏)의 시조로 처음 이름은 종례(宗禮)이며 시호는 충문(忠文)이다.

  나총례는 어려서부터 자품이 웅위(雄偉)하고 영용다지(英勇多智)하여 학문과 무용이 뛰어났다. 신라말엽 금성지방의 호족으로 금성성주(錦城城州)가 되었다.

  후삼국의 형세가 그 미래를 가늠할 수 없을 즈음 후백제왕 견훤(甄萱)은 금성 지역 부락들을 약탈하는 등 횡포를 부리면서 영산강 유역을 장악하고자 그 요충인 금성을 수차 공격하여 왔으나 나총례의 지휘 하에 민관군이 일체가 되어 성을 굳게 지켜 견훤의 공세를 번번이 물리쳤다.

  태봉(泰封)의 왕 궁예는 장차에 있을 후백제와의 통일전쟁을 염두에 두고 배후 근거지를 확보하기 위해 막료인 왕건(王建)장군을 남방경락의 선봉으로 내세워 출전시켰다.

  ○三년 나총례는 왕건장군이 금성 무안 등 서남해안을 공취(攻取)하여 오자 구세제민(救世濟民)하려는 일념(一念)으로  성문을 열어 환영하며 적극 협력하였고 왕건장군은 금성 외 공취한 십여 군현을 합하여 군사를 나누어 나주(금성)성을 지키게 함으로 장차 고려창업의 기틀을 마련하는 초석이 되게 하였다.

    九一八년 왕건이 홍유 배현경 신숭겸 복지겸 등의 추대로 왕위에 올라 고려를 세우고 이어 전개된 후삼국 통일 과정에서 공을 세운 나총례에게 삼한공신(三韓功臣)을 책봉하고 대광(大匡)을 제수 하였도다.

  제二대 혜종 원년(九四三)에는 북변방어에서 그 이듬해에는 왕규(王規)의 난을 평정하는데 공을 세웠다. 정종 二년(九四七)에는 박수경과 더불어 내란을 평정하는데 또다시 큰 공을 세웠다. 고려성군 문종 八년(一○五四)에 삼한통일공신 三천 二백명에게 추증할 때 나총례는 二十五번째로 금성부원군(錦城府院君)을 추봉하고 충문(忠文)이란 시호를 하사받도다.

  고려사 열전 편에“대장군 나유(羅裕)는 나주인(羅州人)인데 삼한공신 대광 나총례의 十세손이다.”라 하였고 익제 이제현(李齊賢)이 지은 금성군 나익희(羅益禧) 묘지문에도 나총례를 삼한공신 대광으로 기록하고 있다.

  후손들은 성향(姓鄕)인 나주시 문평 무학산록(無鶴山麓)의 용트림하는 혈처에 단(壇)을 모셔 참배하는 곳으로 삼고 경모사(景慕祠)에 위패를 후손 九十위(位)와 함께 봉안하여 일 년에 한차례 씩 숭선보본(崇先報本)의 추모행사를 거행하고 있다.

  공의 역사적 공적과 삼한일통정신을 기리기 위해 二○○七년 十월에 경기도 파주시 고려통일대전(高麗統一大殿)에 봉안 배향하니 그 공훈(功勳)은 천추에 불멸할 것이요. 충령(忠靈)을 보우하는 향화(香火)는 만년에 이어지리로다. 

단기 四三四五(서기二○一二)년 五월 六일

고려역사선양회(高麗歷史宣揚會) 기술하고

금성나씨대종회(錦城羅氏大宗會) 삼가세움

출처 : 금성 나 씨 대종회
글쓴이 : 나진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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