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성[수성]나씨

[스크랩] 금성나씨 가문유래(錦城羅氏 家門由來)

미르뫼 2013. 5. 31. 16:14

 

중국 고대 축융(祝融)의 후예로 알려진 금성나씨는 기원전759년(주나라 무왕때)에 광정공(匡正公)이 공을 세워 나국(羅國)에 봉해짐으로서 나라 이름을  따서 성(姓)으로 삼은 것이 나씨(羅氏)가 되였다.

금성나씨대동보에  의하면 축융의 후손 주공(珠公)이  한고조(漢高祖)때  나라에 공을 세우고 예장군(豫章君)에 봉해져서 예장 나씨(豫章羅氏)가 되였다.

당(唐) 태종(太宗)때 상서좌북야(尙書左僕射) 나지강공(羅至强公)이 조정의 고구려 정벌론을 반대하고 우리나라 (발라형=나주)에 망명한 후 신라국 좌승상 (左丞相)에 이르렸으며 그후에 십여대가  대대로 나주지방에서 거주 하였다.

그러나 상대의 소목계통(昭穆系統)이 명확하지 않아 후삼국(後三國) 통일때 공을 세운 삼한벽상공신(三韓壁上功臣) 삼중대광(三重大匡) 금성부원군(錦城府院君)이신 나 총례(羅聰禮)를 시조로 한다.

나주시 문평 소재 경모사(景慕祠)에서 시조로부터 15대조까지 91위(位)을 봉안(奉安) 매년 양력 5월 첫째주 일요일에 금성나씨 모두가 향사(享祀)에 참배한다.

 

고려사  열전편(烈傳篇)을 비롯하여 모든 문헌에 나주나씨(羅州羅氏)  시조(始祖)는 나총례(羅聰禮)라 되여 있고, 모든 인물이 나주인(羅州人)으로 되어 있다. 그것은 본래 나주인(羅州人)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영조조(英祖朝) 무신(戊申:1728)년에 戊申凶變의 혐의를 벗기 위하여 변의문을  내고  錦城羅氏로 이관하여 錦城羅氏라 부르게 되였다.

[변의문] 나주의 나씨는 두 씨족이 있으니 나부(羅富)를 시조로 하는 나씨는 근본이 여황인이다. 여황이 나주에 혁속된 고로  나주라 이관하고 금성나씨는 4세가 금성군(錦城君)이므로 금성(錦城)으로 관(貫)을 삼으니, 대개 연혁이 같지 않고,

실로 관이 같아서 입는 협의를 없게  할 따른이다. 본관이 나주였다가가 금성으로 옮겨진 실증(納籍記)은 숙종43년(1717)이전부터  영조5년(1729)까지 나주로 납적하고 영조8년(1732)부터 영조32년(1756)까지는 거평(居平)으로 납적하고 영조35년(1759)부터는 금성으로 납적하였다.

금성나씨는 고려 개국시 한강의 양천허씨(陽川許氏) 금강의 전의이씨(全義李氏) 가문과 더불어 영산강 유역을 대표하는 성씨

(姓氏)로 자리 하였다.

 

                                                                           2007.     4.

 

 

                                                한국 족보학연구소장 양권승 (梁權承)

출처 : 금성 나 씨 대종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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