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성[수성]나씨

[스크랩] 이인좌난의소고

미르뫼 2013. 8. 17. 16:38

 

 

▲2003년 3월 22일 KBS 1TV 역사스페셜 방영 때의 필자

 

'이인좌의 난'에 대한 소고

(족보 및 입적과 이인좌의 난)
    1728년 무신년(戊申年) 3월에 합천 거창 함양 청주 평택 문경 상주 정읍 부안 춘천 서울 평양 경흥 등지에서 발발한 이인좌의 난 또는 무신란을 무신사태․무신기병(戊申起兵)․무신의거․무신혁명이라고필자가말한 것은, 역적으로 참수된 전봉준의 동학란을 동학혁명이라고 하고, 진주민란을 진주농민항쟁, 인조반정을 인조쿠데타라고 하는 것과 같다.

  권인호 박사는 1995년에 발간한『조선중기 사림파의 사회 정치사상』이란 책 등에서, “노론(서인)과 외척의 세도정치가 민중을 외면하고 지역차별까지 겹치자, 홍경래의 난과 진주농민항쟁 및 동학농민전쟁이 일어났는데, 무신란은 이를 촉발시킨 역사적 의의를 가진다. …무신란 후 경상우도는 50년간 정거를 당하여 인조반정에 이어 또다시 200년간 울분의 세월을 보내야 했다”고 서술하고 있다.

  더구나 2001년 남명 탄신 500주년을 맞아하여 2000년 12월 경남도청에서 발간한『경남 정신의 뿌리, 남명 조식선생』이라는 책자에, “인조쿠데타 이후 경상우도(경남)에 대한 지나친 차별대우와 민중에 대한 탐학 등에 반기를 들고 이 지방에서 무신란(1728년)과 임술농민항쟁(진주민란: 1862년) 등이 일어났다. 이것은 민중의 힘이 어떤 것인가를 보여준 좋은 본보기가 되었다. …(중략)…나라와 민족을 위한 타협 없는 불굴의 의리(義理) 정신은 지리산의 우뚝함과 이를 바탕으로 한 남명학파의 특질이다”고 하였다.

  또한, 2001. 2. 19일자 경남신문, 3. 7일 및 8. 2일자 국제신문, 8. 13일자 경남도민일보에, “…이후 남명의 실천정신은 경상우도에 면면히 발휘되었다. 중앙정부의 부패한 권력에 반기를 들고 일어난 무신란(1728년)과 임술농민항쟁(1862년, 진주민란) 등이 그것이며, 3․1 독립만세운동의 중심지가 바로 경상우도였다”라고 했으며, 2001년 합천임란창의 기념사업회에서 출간한『합천임란사』의 발간사 등에, “인조반정은 조선왕조 최대의 비극이며, 무신란은 민중운동이다ꡓ라고 하는 등 무신사태(무신란)에 대한 최초의 공개적인 재평가 작업이 있었다.

  2002년 8월 17일 남명제 국제학술회의 시에 한국학중앙연구원 박병련 교수는, “무신란(무신사태)은 강우지역 남명학파의 몰락을 가져온 사태였고, 조성좌 가문은 북인 명문세가로서 남명학파의 핵심지주였으며, 정치사 연구에서 조성좌의 가계를 이해하는 것은 기초적인 사항에 속하나 알고 있는 사람은 많지 않고, 무신란 주역인 이 가문은 무신란 후 가문의 쇠퇴는 물론이고 남명학파의 중심지주 하나가 무너졌다”라고 주제발표를 했다. 그리고 2003년 12월 경상대학교 남명학 연구원에서 발간한『남명학 연구』제16집에서 김낙진 교수는, “무신란은 하층민인 백성이 왕권의 정당성에 의문을 제기하는 혁명의 성격도 가지고 있었다”고 하였다. 늦었지만 이렇게 무신사태에 대한 재평가가 점차 이루어지고 있다.

  2003년 3월 22일 KBS 1TV 역사스페셜 “경종 최후의 날, 왕은 독살 당했는가?”에서, 합천군 봉산면 권빈리 석가산에 있는 조성좌의 묘소 및 의거비(묘비) 전경과 함께 필자의 인터뷰가 전국에 방영되어 묻혀진 무신사태가 우리 곁으로 다가오는 계기가 되었다.

  역사적 사실(fact)에 대해서는 그 누구도 날조 왜곡할 수가 없다. 그러나역사적평가(valuation)와해석(interpretation)에대하여는 실체적 사실에 근거하여 상이한 결과가 나올 수 있다. 물론 국사편찬위원회 등과 같은 전문기관(또는 전문가)에 의한 평가와 해석이라야 한다. 특히, 제도권 학술기관인 국사편찬위원회에서 1994년 발간한『영조무신역옥추안』해제에, “무신란은 조선후기 정치체제와 권력구조의 모순에 의하여 일어난 의리(義理) 명분논쟁의 한 양상이면서 동시에 대규모적인 권력투쟁의 표출이었다.…아무튼 무신란의 역사적 성격은 조선후기 정치체제와 권력구조가 지니고 있던 모순에 의하여 일어난 소외계층의 변혁운동이라고 할 수 있다”라고 명확하게 규정하고 있다.

  세종대왕의 11세손인 이인좌(고모부가 고산 윤선도의 증손인 윤훙서(공재 윤두서 兄))는 청천(괴산군 청천면)에서 기병하기 전 자신의 모든 노비 약1,000여 명을 방역한 후 기병을 했으며, 부안 변산반도의 김단․정팔룡 등 9,000여 명의 노비적과 지리산의 박필영 및 구례 연곡사 승(僧) 대유(大有)는 연곡사․쌍계사․화계사를 거점으로 승려 출신인 정읍의 송하(宋賀)와 연계한 명화적 약20,000명이 참여했다고 역옥추안 등에서 언급하고 있다. 또한 대구감영(경상감영) 남문 앞 대로변에 세운 소위 평영남비에는 경상우도에서 참여한 숫자가 70,000명이라고 적혀 있고,『충훈부등록』노적 명단에 노비․주막주인 등의 재산도 몰수하고 처형했다는 기록에서, 그리고 실록 영조4년 3월 23일에, “이인좌 군사는 각처의 토적(土賊)과 청주진(淸州鎭)․목천 등 고을의 마병(馬兵)과 금어군(禁禦軍)으로서 정예한 자를 뽑아 장사치와 거지 차림을 하여 피난민 가운데 섞여 경기도 안성(安城) 청룡산 속에 모여 있었으며, 산 아래 촌락이 거의 적의 소굴이 되어 있었는데도 누구 하나 고하는 자가 없다”는 것에서도, 광범위한 민심이반과 함께 토적 등 소외계층의 무신거사 참여 실상을 알 수 있다.

  무신사태 때 거사군들은 “한 사람의 백성도 죽이지 말고(不殺一民), 재물을 빼앗지 말며(不奪民財), 부인들을 겁탈하지 않는다(勿怯婦人)”는 행동강령을 채택했으며, 가장 중심적인 세력은 변산반도와 순창․영암 등지의 소외계층인 천민층(賤民層)이었다. 이종범이 쓴『1728년 무신란의 성격』․『전통시대의 민중운동』과 이이화의『한국사이야기』,『두산세계대백과사전』등에도, “소외계층의 변혁운동이며 홍경래의 난 등에도 영향을 끼쳤다”고 기술하고 있다. 또한 조선에서 일본 도쿠가와 막부에게 무신사태에 대해 설명을 했다는 것에서 국외적인 사건(사태)이기도 하였다.

  필자가 현재까지 확인한 진주 합천 거창 등 경상우도에서의 무신혁명 참여 후 죽임을 당한 사람들은, 합천 묘산․봉산면과 거창 위천면의 조성좌(曺聖佐)와 정희량(鄭希亮) 문중 사람들을 위시하여, 산청의 남명 후손 조철(曺撤), 합천 묘산 화양리의 현감 윤자선 후손인 윤종영(尹宗英), 합천 봉산 권빈리의 손후빈(孫後彬)․손세덕(孫世德), 합천 상상곡(上上谷)의 이성장(李星章)․이태망(李台望), 합천 대병면의 의병장 권양 후손인 권만항(權萬恒)과 유학자 임진부 후손인 임한성(林漢成), 합천좌수 정상림(鄭商霖), 합천 가회면의 허돈 후손인 허련(許璉), 삼가현의 백세달(白世達), 함양의 신수헌(愼守憲)과 아들 신윤증(愼潤曾), 함양의 허격(許格)․심수명(沈壽明)․이만채(李萬采)․이익춘(李益春)․정규서(鄭奎瑞), 진주의 이덕일, 창녕의 조세신(曺世新), 하동의 이명근, 고성의 박필이(朴必伊), 고령의 배중도(裵仲度) 등이다. 그러나 각 문중의 족보에는 이름이 거의 누락돼 있다.

  더구나 정사(正史)인『조선왕조실록』영조9년 2월 25일, 영조13년 7월 1일, 영조16년 12월 5일에, “안음과 합천은 정인홍의 악취를 남긴 곳이기에 정희량과 조성좌 같은 흉역의 무리들이 출생하였고, 조식의 사상이 불순하고 바르지 못하기 때문에 그의 문하에 정인홍이 나왔으며, 경상우도는 기절(氣節)을 숭상하여 (1728년) 무신란 때 범법자가 많았으나, 이황의 (안동 등) 경상좌도는 범법자가 없었기 때문에 경상좌도는 마땅히 등용해야 한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이는 조정(朝廷)에서 무신사태의 사상적 연원을 남명 조식과 내암 정인홍으로 소급 적용했다는 사료(史料) 중의 하나이다.

  무신기병 실패 후 경상우도 남명학파는 쑥대밭이 되었다. 심지어 합천 가야에 겹눈동자(重瞳)를 가지고 있는 정인홍 증손이 영남 민심을 현혹시킨다고 하여 1729년에 장살(杖殺)된다. 그러나 조정으로부터 큰 은혜를 받은 사람들은 다름 아닌 아전(일명 서리)들이었다. 남명과 내암이 백성을 수탈하는 한 축인 아전의 비리를 탄핵하고 개선해야 한다고 한 그 아전들이 많은 은혜를 입었다.

  1728년 3월 22일 무신거사를 감행할 때 거창의 좌수 이술원 등이 정희량에게 저항한 것과 달리 합천의 아전 및 장교들은 조성좌 진영에 가담하였으나, 청주의 이인좌군사가 병조판서인 오명항의 관군에 의해 3월 24일 진압되었다는 정보를 3월 27일 입수하고 조성좌를 배신하게 된다.

  조성좌를 진압한 후 조정(朝廷)에서는 배신자인 그들에게도 9,000여 명의 공신녹권자의 한 사람으로 선정하여 공신녹권을 주었고, 300여년 동안 세습되어 내려온 아전을 면(免)하여 주었으며, 행장․문집 등에서 그들을 미화하여 통치의 수단으로 이용하였다.

『조선왕조실록』영조4년 3월 26일을 보면, “…합천군수가 도망가고, 정상림이 조성좌를 석방하고, 군중(軍中)으로 들어가니 장교와 이졸(吏卒: 아전)들이 조성좌에게 절을 하였다”라고 쓰여 있고, 영조의 어명에 의해 편찬한『무신감란록』에, “조성좌가 원수(元帥)로 추대되고 합천객사에 진을 치니 아전과 장교들이 바람처럼 쓰러졌다”고 했으며, 합천관아의 아전이 쓴 일기에도, “조성좌가 객사에 웅거하여 합천관아의 군사와 장교를 호령하니 감히 누가 어찌할 수가 없었다”라고 증언한데서 명확하게 알 수 있다 하겠다. 그런데도 아전 등에 대하여 기록한 미화된 묘비명과 행장 등이 무신기병의 실체적 진실인양 오도(誤導)되고 있다.

  조성좌에 관하여는「석가산의 쇠갓」이라는 전설이 1995년 합천문화원에서 발간한『합천郡史』에 실려 있는데, 그 내용은, “무신년에 정변이 일어나자 조성좌가 분연히 일어나 지방민을 동원하여 의병을 일으켜 올바른 조정을 만들려고 했고, (합천 봉산면 권빈리3구의) 손후빈은 조성좌의 참모로 크게 활약하다 (관군에게) 체포직전 각종 서류를 불태우고 혓바닥을 끊어 항거했다”라는 것이다.「반란」이 아닌「의병」으로 올바른 조정(朝廷)을 만들고, 손후빈은 끝까지 조성좌를 위해 항거했다는 전설에서 민중의 소망과 조성좌의 리더십과 인간 됨됨이를 알 수 있다. 전설은 왜곡(歪曲)된 역사기록보다 객관적 사료로써의 가치가 더 있기 때문이다.

  정희량을 폄하하여 기술한『화곡무신일기』에도, “정희량이 기병하자 순식간에 1,000여 명이 모였으며, 폭풍에 나무가 쓰러지는 것 같았고, 마을 백성과 읍리(邑吏)들은 역적에게 달려가서 한통속이 되었음은 말할 필요조차 없으며, 사대부들도 거의가 역적을 따랐으니 참으로 통탄할 일이다”라고 기술하고 있다. 조성좌가 합천과 삼가를, 정희량이 거창과 안음․함양을 점령한 후, “창고의 곡식을 풀어 주민들에게 나누어 주었다”는 기록도 있으며, 해인사(海印寺) 승려들은 거사군(擧事軍)들이 사용할 신발을 만드는[納鞋(납혜)] 등 무신기병에 참여를 했다. 또한 조성좌는 30대 초반의 나이에 거사를 하여 위급한 상황에서도, “촛불을 켜고 책을 보았다”라는 기록에서 침착하고 글 읽기를 게을리 하지 않고 자기 연마를 한 인물로 유추할 수 있을 것이다.

  유생들이 무신기병을 어떻게 평가하였는지에 대하여 알 수 있는 사료(史料)가 있다. 즉, 실록 1733년 영조9년 8월 27일조에 남원괘서사건에 연루된 하동의 조영하(曺永河)가, “조성좌형제가 죽임을 당한 후, 조성좌형제와 동접인 곽처웅은 문장과 재능이 훌륭한데도 과거에 나아가지 않았고, 무신년에 (조성좌를 진압하기 위해) 출정한 사람과는 절대 왕래하며 상종하지 않았다”라고 공술하고 있다. 무신기병이 발발한지 5년이 경과했는데도 불구하고, 진주 합천 하동 남원 등 유생들은 과거를 보지 않았고, 무신사태를 평정한 사람들과는 절대 왕래도 상종도 하지 않았음을 알 수 있는데, 이는 무신기병이 실패한데서 오는 선비들의 허탈감과 함께 무신사태 진압 후 조정(朝廷)을 바라보는 일반 선비들의 시각을 알 수 있는 자료이다. 또한 남원괘서사건을 무신기병과 연관시켜 곽처웅 등을 물고(처형)하는 등 가혹하게 탄압했다.

  무신기병 때에 합천 초계 삼가 주민 4,000여 명이 참여했는데 이는 1759년에 발간한『여지도서(輿地圖書)』에 합천 초계 삼가의 총 가구수가 10,393호임을 볼 때, 대부분의 사람들이 직간접으로 참여한 것이며, 이인좌 군사는 관군과 치열한 전투로 인해 시체가 산처럼 쌓였다고『국조보감』에 기록되어 있다. 심지어 제주도 남제주군 성산읍 난산리의 오흥태(吳興太)가 무신사태 때 모병(募兵)하여 육지로 진격하려고 한 것과, 박사수가 영조에게, “무신란 후 유배된 자가 팔도를 합산하면 무려 1,000명에 달하고 있어 변방과 도서 주민들의 피해가 이미 참담할 지경에 이르렀고, 더구나 역족(逆族)의 찬배자(竄配者)가 줄을 이어 남해와 거제 같은 고을 원주민은 2, 3호에 불과하고 나머지는 모두 귀양살이하는 무리이며, 이들은 모두 그 땅에서 나는 것을 먹기 때문에 물자가 아주 부족하여 주객(主客)이 아울러 곤란을 겪고 있고, 또 온당치 못한 무리들이 한 섬에 많이 몰려있으니 일후의 걱정도 꼭 없으리란 보장이 없으므로, 마땅히 의금부로 하여금 다른 지방으로 나누어 배치하게 하여 흉족(凶族)들이 머리를 맞대는 길을 끊어야 한다”고 보고한 사실에서도, 무신사태가 정국에 끼친 영향력의 크기를 가늠할 수 있다. 현재 집안에 족보가 없거나 1900년대에 족보를 만들기 위해 같은 성씨(姓氏)에 입적(入籍)을 했다면 그들의 선조들이 무신사태에 연루되었을 개연성이 아주 높다.

  조성좌 문중(門中)은 밀양의 유학자 송계 신계성(松溪 申季誠), 안동 예안의 참판 농암 이현보(聾岩 李賢輔), 성주 수륜의 유학자 서계 김담수(西溪 金聃壽), 충남 보령의 영의정 아계 이산해(鵝溪 李山海: 土亭 李之函의 조카), 성주 대가의 참판 동강 김우옹(東岡 金宇顒), 김천 조마의 참판 동포 배흥립(同圃 裵興立) 문중과 혼인 관계를 맺고 있었다.

  또한, 조성좌 문중은 합천 가야의 대사간 용담 박이장(龍潭 朴而章), 안동 풍천의 영의정 서애 유성룡(西厓 柳成龍), 남양주 조안의 다산 정약용 문중인 대사헌 개석 정윤복(介錫 丁胤福), 고령 우곡 도진리의 의병장 양죽당 박정완(養竹堂 朴廷琬) 및 예빈시주부 학암 박정번(鶴巖 朴廷璠), 합천 쌍책의 의병장 설학 이대기(雪壑 李大期), 예산 신양의 우의정 한수 조정(漢叟 趙挺), 합천 율곡의 부사 태암 문홍도(泰巖 文弘道), 합천 대병의 의병장 화음 권양(花陰 權瀁), 합천 가회 구평마을의 우참찬 추담 윤선(秋潭 尹銑), 거창 위천의 참판 동계 정온(桐溪 鄭蘊), 충북 보은읍의 첨지중추부사 간서재 김덕민(澗西齋 金德民), 산청 신등의 동부승지 동계 권도(東溪 權濤), 괴산 청천의 참판 취죽 이응시(翠竹 李應蓍), 경기 여주의 대사헌 만한 조수익(晩閑 趙壽益), 인조 임금의 동생인 경창군 이주(慶昌君 李), 성주 벽진의 부사 서암 여효증(西巖 呂孝曾), 경기 안산 이동의 대사헌 매산 이하진(梅山 李夏鎭: 星湖 李瀷의 아버지), 경북 문경의 참판 임하당 신후명(林下堂 申厚命) 등의 문중(門中)과도 혼인 관계를 맺고 있었다. 즉, 조성좌 문중은 북인(北人) 및 남인(南人)의 명문세가(名門世家)였으며, 또한 남명학파(南冥學派)의 중심지주였음을 알 수 있다.

  함경도에서 경상도까지 연계되어 발발한 무신기병 실패 후, 영조는 탕평책을 쓰는 등 국론을 통합하려고 했다. 무신기병에 소외계층 수만 명과 신숙주(영의정), 황희(영의정), 정인지(영의정), 조광조(대사헌), 이덕형(영의정), 이시백(영의정), 박동열(대사성), 민희(좌의정), 이응시(이조참판), 정온(이조참판), 조정립(목사) 등의 후손들도 대거 참여했기 때문이었다.

  특히, 고령申氏인 신숙주의 후손들도 대거 무신기병에 참여하여 풍비박산이 되었는데, 같은 문중인 단재 신채호(丹齋 申采浩)는 “정인홍”․“묘청의 난”을 조선역사의 중요한 인물과 사건으로 본 독립운동가요 역사학자라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이처럼 무신의거는 그 후 신채호 등 남인 가문과 소론, 소외계층에게 크나 큰 영향을 끼쳤다.

  그러나 영조 재위 52년 동안 노론(서인) 집권세력은 1728년 무신기병(戊申起兵, 이인좌의 난)에 연관되었다고 판단되면 가차 없이 처단했다. 1730년에는 1,000여 승군(僧軍)과 팔월산 도적이 남인과 연계한 것이 무신기병과 관련이 있다고 하여 남인을 색출했고, 1733년(영조9) 3월 보은읍의 장곡서당 사건도 무신여당(戊申餘黨)의 소행이라 하여 조성좌의 외갓집 사람 등이 처형되었으며, 1755년 1월 나주벽서사건과 5월 토역경과투서사건(討逆慶科投書事件) 역시 무신여당의 소행이라 하여 좌의정 조태억(趙泰億)․영의정 이광좌는 관직추탈, 장령 유수원․어영대장 박찬신(함양朴氏)과 춘천의 강몽협(姜夢協)․유봉성(柳鳳星)․윤혜(尹惠) 등 500여 명이 처형되고, 이광사(연려실 이긍익 父)는 귀양 가 죽었다. 또한, 1787년(정조11) 6월에는 제천의 김동익(金東翼) 등이 정희량의 손자 정함(鄭醎, 일명: 鄭應周)과 이인좌의 아들을 받들어 반란을 모의하다 김동익이 처형되었다.

  이와 같은 사실은 조하주(曺夏疇: 조성좌 祖父인 曺夏全의 10촌 동생이며, 무신사태 때 처형된 조세추의 祖父)의 손아래 처남이며 경기도 안산시 일동에 칩거하고 있던 ‘성호 이익(星湖 李瀷, 1681~1763)’이 지은『성호문집』 중 문족등과기(門族登科記)에도 그 실상이 잘 나타나 있는데, “무신역란(戊申逆亂) 후에는 대가(大家) 명족(名族) 문인(聞人) 현사(顯士) 달관(達官) 비위(卑位)를물론하고서로 이어 육몰(戮沒)하였으며, 연루자가 나라 안에 편만(遍滿)하였다. 그리하여 수년 동안에 기상이 꺾이고 무너진 것이 겁화(劫火)가 지나가고 상전(桑田)이 벽해(碧海)가 된 뒤와 같다”라고 증언하고 있다. 이는 성호가 47살 때 장인의 문중(고령申氏인 신필청)과 누나의 시댁 문중(창녕曺氏인 조경하․세추)이 무신사태에 주도적인 역할을 하여 몰락한 것 등을 직접 보고 실상을 증언한 것이다.

  성호(星湖)의 증언을 뒷받침하는 사례 중 하나로, 성호와 같은 시대 같은 지역에 거주하면서 교유한 문인화의 대가인 표암 강세황(豹菴 姜世晃, 1712~1791, 祖父: 좌찬성 강백년)을 보면 잘 알 수 있다. 표암 장인의 兄인 유래(柳徠, 1727년 증광시 급제)가 무신사태와 연계되어 장살되고, 표암의 친형인 강세윤(姜世胤, 이천부사)이 무신사태에 연루되어 중도부처된 관계로, 표암은 61세까지 관직에 나가지 못했다. 표암은 안산시 부곡동에 거주하면서 단원 김홍도 등 제자를 양성하는 등 한국적인 남종 문인화풍의 정착에 기여하고 진경산수의 발전과 서양화법의 수용에도 업적을 남기는 역설적인 결과를 가져왔는데, 이처럼 무신사태와 조금이라도 연루된 문중은 조정으로부터 가차 없이 차별과 억압을 받았다.

  심지어 1873년 및 1876년에 척사론자인 노론의 최익현(崔益鉉)과 김평묵(金平)은 그들의 상소 등에서, “이현일․한효순․목내선 등의 신원을 요구한 사람들을 추율(追律, 반역죄로 처벌)해야 하며, 南人인 윤휴(尹鑴) 이후로 우리 서인(노론)과 남인은 원수가 됐다. 만약 서양과의 조약이 성립된 후에 민암․목내선․이인좌․정희량의 남은 후손들이 백성의 불인(不忍)한 마음을 이용하여 창을 들고 도성과 대궐을 침범한다면 서인은 일망타진될 것이다”라고 주창하는 등 척양(斥洋) 즉, 서양세력의 일망타진보다 또 하나의 적(賊)인 무신사태의 후손 등 남인세력의 일망타진에 척사의 비중을 더 두었고, 조선을 망하게 하는데 일조한 집권 노론세력들은 조선이 망하는 그 시점까지 무신당(戊申黨)과 남인들을 원수처럼 배척했다.

  이렇게 경상도, 특히 진주 함안 거창 합천 함양 등 경상우도는 1589년(선조22) 기축옥사(己丑獄事, 정여립 모반사건) 후 심화된 전라도의 지역차별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300년 동안 철저하게 차별을 받았다. 이러한 차별은 박정희(고령朴氏)의 등장으로 해소되게 되는 국면으로 전환되고, 전두환 정부 때인 1984년 1월이 되어서야 산청의 조식(曺植) 유적지인 산천재․덕천서원․묘소 등이 국가문화재인 사적 305호로 지정될 수 있었다. 역사의 아이러니라고 아니 할 수 없다.

  그렇지만 1728년 3월에 발발한 무신사태는, 사회변동과 정권추이에서 분출된 각 저항세력이 무신사태 실패로 인해 왕조교체까지는 이르지 못했다고 하더라도 지속적으로 정권교체를 지향했던 역사적 사태였다. 무신기병 이후 전개된 탕평(蕩平)의 논리가 노론으로 권력의 소수집중을 초래하면서도, 1730년(영조6) 공사(公私) 노비 중 양처(良妻) 소생은 어머니를 따르게 하는 종모법(從母法)을 실시하고, 1750년(영조26)에는 균역법(均役法)을 채택하여 양인(良人)들의 부담을 경감시키고, 1764년(영조40)에는 노비 관리 기관인 장례원(掌隷院)이 혁파되었다. 또한, 한강 각 나루에 종3품 별장(別將)을 파견하여 서울 경비를 강화하는 등 제도 개선도 마련하게 되었다. 이는 무신사태의 민심동태와 관련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연암 박지원(1737~1805)의『허생전(許生傳)』에서 허생이 변산 노비도적과 무인도를 개간하여 이상국가를 건설하는데, 이는 1728년 무신사태 때 참여하여 새로운 세상을 만들려고 했으나 무신사태 실패로 좌절한 소외계층인 정팔룡 등 부안 변산 노비도적을 소설화한 것임을 직시해야 한다. 박지원의 祖父벌 되는 박필현․필몽 등이 무신사태 때의 핵심적인 인물로서 처형되었던 가문의 영향 때문이기도 하다.

  그동안 왕조사관 등에 의해 당쟁사(黨爭史)의 일환으로, 또는 이긴 자의 입장에서 일방적으로 왜곡 폄하되어온 소위 무신란(戊申亂)은 보다 객관적 실체적 진실에 의거하여 재평가되어야 하며, 현재「이인좌란」․「무신란」이라고불리어지는명칭은,「무신사태」․「무신기병」․「무신의거」․「무신혁명」등으로 불리어져야 마땅하다.

출처 : [직접 서술] 블로그 집필 - 孤竹堂

출처 : 금성나씨 (호남종친회)
글쓴이 : 무등산자락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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