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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이인좌의 난 (조선 역사) [李麟佐 ── 亂, 무신란]

미르뫼 2013. 8. 17. 16:37

이인좌의 난 (조선 역사)  [李麟佐 ── 亂, 무신란]

 

1728년(영조 4) 소인과 남인의 일부세력이

영조노론을 제거하고

밀풍군(密豊君) 탄(坦)을 추대하고자 했던 반정.

 

이인좌가 거병했으므로 '이인좌의 난'이라 하며,
무신년(戊申年)에 발생했으므로 '무신란'이라고도 한다.
16, 17세기 이후 농업생산력과 상공업이 발전하는 가운데 농민층 분해와 신분제 해체가 진행되었다.
 
정부는 수취체계 개편 및 운영개선을 논의·시행했으나, 실효를 거두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농민들에게 오히려 불리하게 작용해 농민들의 부세저항이 심해지고 유민(流民)이 증가했다.
 
이러한 피지배층의 저항은 지배세력의 물적·인적 지배기반까지 동요시켰다.
지배세력간에는 사회변동에 대한 관점에 따라 갈등이 심화되었고,
국왕권을 둘러싼 권력투쟁으로 전환되었다.
 
특히 1720년에는 왕세자(뒤의 경종)를 지지하는 소론과
연잉군(뒤의 영조)을 지지하는 노론 간의 갈등이 심화되었는데,
그해 경종의 즉위로 소론이 집권하게 되었다.
그러자 노론은 연잉군을 세제(世弟)로 책봉하고 이어 세제청정(世弟聽政)까지 실현하려다가 축출당했으며,
잇달은 목호룡(睦虎龍)의 고변으로 철저히 축출되었다.
 
이때 소론 내에는
노론에 대한 처벌방법을 두고
과격파인 준소(峻少)와 온건파인 완소(緩少)로 분열되었다.
 
1724년 경종의 죽음으로 영조가 즉위하여 김일경(金一鏡) 등이 제거되고
노론정권이 성립하자 김일경파의 박필현(朴弼顯)·이유익(李有翼) 등은 비밀조직을 결성하기 시작하여,
궁중에서는 이하(李河)·민관효(閔觀孝)·윤덕유(尹德裕) 등이,
지방에서는 정준유(鄭遵儒)·나만치(羅晩致)·조덕규(趙德奎)·조상(趙鏛)·임서호(任瑞虎)·정세윤(鄭世胤)·권서린(權瑞麟)·이호(李昈)·민원보(閔元普)·민백효(閔百孝)·김홍수(金弘壽)·이일좌(李日佐) 등이,
그리고 평안병사 이사성(李思晟)과 중군별장 남태징(南泰徵)이 가담했다.
이들은 김홍수·정세윤 등 재지사족층을 제외하고는 거의 세가명족의 후예이지만 현실적으로 정치에 참여할 수 없었으므로,
영조와 노론의 제거를 통해 정치에 진출하고자 했다.
 
따라서 영조는 숙종의 친아들이 아니며,
경종을 독살했다는 등 영조의 왕위계승부당성을 선전하며 명분을 확보함으로써 밀풍군 탄을 추대하기로 하고,
정변의 기본전략을 외방(外方)에서 먼저 일으키면 경중(京中)에서 이에 내응하는 외기내응(外起內應)으로 확정했다.
경중내응은 준소·탁남·소북계 세력이, 외방기병은 정세윤·이인좌의 지도 아래 외방토호와 재지사족층이 하기로 했다.
 
외방기병의 지휘권을 맡게 된 이인좌는 감사를 지낸 이운징(李雲徵)의 손자로 남인명가의 출신이었지만 관직으로 진출할 수 없었다.
그는 경기·호서·영남 세력의 중개역할을 하는 한편 남인명가의 후광을 업고
영남의 사족과 접촉했다.
 
또한 정세윤은 정인지(鄭麟祉)의 후손이지만 몰락양반으로 600~700명의 세력을 포섭했다.
 
그런데 이때 영조와 탕평파는 정미환국(丁未換局)을 일으켜,
노론의 일부를 후퇴시키고 청남(淸南)과 완소를 정계에 기용함으로써
소론·남인을 무마하여, 삼남흉황과 유민의 속출, 노론의 민정실패에 따른 외방의 동요에 대처하고자 했다.
이로써 반남인·반소론적인 영조와 노론을 제거한다는 명분이 약화됨에 따라 일단 서울의 주도층은 거사준비를 중지하고 사태추이를 관망했으나,
 
이인좌·정세윤·한세홍(韓世弘) 등의 재지사족들은 준비를 계속했다.
 
이인좌는 영남기병을 정희량(鄭希亮)·김홍수에게 맡기고,
호남기병은 태인현감 박필현(朴弼顯)에 맡겼으며,
자신은 정세윤과 경기기병을 추진하여 중도에서 영남병·호남병과 합세하기로 했다.
 
한편 정세윤은 호남사족층에게 협조를 요청하고,
금영(禁營)의 조총을 사들여 무장하고, 평안병사 이사성에게 군자금을 요구했다.
 
이때 경중주도층은 한세홍을 통하여 거사강행의 소식을 전달받고 군사·자금을 모집했으나, 실천의지가 약했다.
 
한편 정미환국으로 재기용된 온건소론에 의해 정변모의가 노출되어 봉조하(奉朝賀) 최규서(崔奎瑞) 등이 각지의 취군상황에 대해 고변하자,
영조는 친국을 설치하고 삼군문에 호위를 명했다.
1728년 3월초 이인좌를 대원수로 한 반란군은
안성·양성에서 거병하여,
3월 15일 충청병사 이봉상(李鳳祥), 영장 남연년(南延年), 군관 홍림(洪霖)을 죽이고 청주성을 함락했다.
반군은 각 창고의 전곡·미·포를 민간에 분급하고 '불살인 불약민재'(不殺人 不掠民財) 및 '제역감역'(除役減役)의 민정강령을 내세움으로써 민의 참여를 유도하여,
청주의 군관·향임층·일반행려·상인 등으로 반군세력이 확대되었다.
 
반군은 황간·회인·청안·목천·진천 등지를 점령하고, 수령을 파견하여 환곡을 분급하며 관노비에게 상급을 주고, 장정을 선발했다.
 
그런데 영남병·호남병의 합세가 이루어지지 않았다.
 
영남에서는 이인좌의 동생 이웅보(李熊輔)가 3월 20일 안음·거창·합천·함양을 점거했으나,
 
안동·상주입거에 실패하고 결국은 관군에게 패했다.
 
호남에서는 박필몽과 박필현이 각각 괘서를 살포하는 등 취병을 했으나 태인거병이 좌절당한 뒤 잡혀 처형당했다.
 
한편 정부는 관문·성문의 파수를 강화하고, 금위영·어영청의 군사를 각 진에 파견하여 내성유입을 통제하는 한편,
 
탁남세력과 윤휴(尹鑴)·이의징(李義徵) 등의 자손, 김일경·목호룡의 가속(家屬)을 체포했다.
 
또한 민심동요를 막고자 강창세곡(江倉稅穀)을 성내로 운반했고,
체불했던 공가(貢價)와 삭료(朔料)를 지급했으며,
아울러 도성사수론을 내리고
황해·강원의 향병징발과 한강수비령을 하달했다.
 
경중내응을 효과적으로 저지한 뒤 오명항(吳命恒) 지휘의 도순무군(都巡撫軍)을 남파했다.
 
이에 반군은 경중내응과 영남병·호남병 북상의 실패에도 불구하고 각 처의 유민·소상인·화전민을 포섭하면서 도성을 향해 진천을 지나 안성·죽산으로 진격했다.
 
그러나 3월 24일 안성·죽산에서 관군에게 격파되어 이인좌·권서봉·목함경(睦涵敬)이 잡혔으며,
청주에 남아 있던 반군세력인 신천영과 이기좌(李騏佐)는 창의사인 박민웅(朴敏雄)에게 체포되었다.
이 소식은 영남·호남 지방에도 알려져 잔존했던 반군세력은 소멸되었다.
무신란은
당시 영조와 집권노론층의 패쇄적 인사정책과 정치보복의 강화, 형정·민정의 실패에 따라서 발생한 사족층·잔반·향임층·하층민의 연대투쟁이었으나,
 
정미환국 이후의 결속력 약화, 경중세력의 취약성, 지도세력 부재와 이중거사계획의 판단착오, 주도층의 오판, 분리적 탈퇴 등으로 실패했다.
 
이후 조정에서는 정미환국 때 재기용되었던 완소가 약화되었고,
노론은 유리한 입장이 되었다.
 
그러나 영조는 무신란의 발생원인을 노론 세력만으로 구성했던 폐쇄적 인사정책 때문인 것으로 보고,
노론강경파보다는
 노·소 간의 조정과 병용책을 주장한 노론 온건파 중심의
탕평책을 추진하게 되었다.
출처 : 금성나씨 (호남종친회)
글쓴이 : 羅亨柱소태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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