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성[수성]나씨

[스크랩] 금성 나씨 (錦城羅氏)

미르뫼 2013. 8. 17. 16:40

금성 나씨 (錦城羅氏)

 

 1> 시조 :  나총례[羅聰禮]

 

 2> 본관 및 시조의 유래

 

     금성(錦城)은 전남 중서부에 위치한 도시로서 본래 백제의 발라군을  통

     일신라에 와서 경덕왕이 금성(일명 금산)으로 고쳤으며, 고려 태조가 후

     백제를 멸망시키고 나주로 개칭하였다.

     중국 고대 축융(祝融)의 후예로 알려진 금성나씨는 기원전 759년(주나라)

     에 광정공이 공을세워 나국(羅國)에 봉해짐으로서 후손들이 고을 이름을

     따서 성(姓)으로 삼은 것이 나씨(羅氏)의 시초가 된다고한다.

    「금성나씨대동보」에 의하면 축융의 후손 주공(珠公)이 한고조 때 나라

     에 공을 세우고 예장군에 봉해져서 예장나씨가 되었다가, 그의 후손 지

     강(至强)이 당나라 태종때 상서좌복야로 고구려 정벌을 반대하다가 미움

     을 받자 동래(東來)하여 백제의 땅인 발라현(지금의 나주)에 정착한 것이

     우리나라 나씨의 시원을 이루었다고 한다.

 

     그러나 계보상에 나타난 금성나씨의 시조는 고려초에 일등공신에 오른

     나총례(羅聰禮)이며, 그의 아들 은고(恩誥)가  금산군에 봉해진것을 시작

     으로 11세손에  이르기까지 3명이 대광의 벼슬에 오르고 4명의 부원군 

     과  5명이 봉군되어 벌족의 지위를 차지했다.

     한편 판호부사 득황(得璜)의 아들 유(裕)는 고려 원종때 김방경과 함께

     삼별초를 토평했고, 충렬왕조에서는 변경에 침입한 거란을 격퇴시켜 회

     원대장군의 호를 받아 가문을 크게 일으켰다.

     고려 말엽에 주로 명성을 떨쳤던 금성나씨는 금성군 익희(益禧)의 손자

     문규(文奎)가 충숙왕때 서해도 안렴사로 나가 치적을 남겼으며, 상장군

     수겸(守謙)의 9세손 계종(繼從)은 조선이 개국되자 벼슬을 버리고 향리로

     돌아가 불사이군의 충절을 지켰다.

     조선 중종과 명종대에 문명을 떨쳤던 세찬(世纘)문규(文奎)의 7세손으

     로 이조참의를 거쳐 대사헌에 올랐다.  세찬의 증손 무춘(茂春)도 광해군

     때 기개높은 학자로 명성을 떨쳤고, 그외 가문을 빛낸 인물로는 득황

     (得璜)의 13세손 치용(致用)이 임진왜란 때 이순신 장군의 막하로 들어가

     노량해전에서 공을 세우고 장렬하게 순절하였으며, 그의 사촌 대용

     (大用) 은 임진왜란 때 이순신의 막하장으로 거북선과 해선을 제작하는

     데 공을 세워 삼지창과 청룡도를 하사받아 평양성 방어에 공을 세운

     승윤(承潤)과 함께 충절(忠節)의 가통을 지켰다.

 

     1985년 경제기획원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면 금성나씨(錦城羅氏)는

     남한에 총 9,490 가구, 39,903 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

 3> 집성촌

 

 

     전남 나주군 세지면 죽동리,송제리(죽제리)

      전남 나주군 문평면 동원리,오용리

      경북 달성군 공산면 백안동

      황해도 옹진군 용천면 용천리

      황해도 금천군 동화면 매서리,매남리

 

추가: 경북 성주군(옛날에는 지금의 고령군, 달성군, 충청 영동일대)에 통덕랑 삼옥제 조께서 일가를 이루어 지금까지 그 1자이신 신암공 이자도자조의 자손들이 모임을 갖고 서로 교류하고 있습니다. 지금은 수성을 본으로 하지만.

<가야산제공>

출처 : 금성나씨 (호남종친회)
글쓴이 : 羅亨柱소태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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