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시.한시.

강가에 돌에 적다[題江石]

미르뫼 2012. 8. 6. 13:54

삼복더위에 보내드리는 홍유손의 탁족시

                                         

                  

 

                       강가의 돌에 적다[題江石]


                                              홍유손(洪裕孫)


 濯足淸江臥白沙(탁족청강와백사) 맑은 강에 발 담그고 흰 모래에 누우니

 心神潛寂入無何(심신잠적입무하) 심신은 고요히 잠겨들어 무아지경일세

 天敎風浪長喧耳(천교풍랑장훤이) 귓가에는 오직 바람소리 물결소리 

 不聞人間萬事多(불문인간만사다) 번잡한 인간속세의 일은 들리지 않는다네


 

                               

                                                    이경윤의 <탁족도>

 

 

 

 * 맛보기 *

 

  해마다 여름철이 되면 우리네 선비들은 세속의 잡다한 일들을 잠시 뒤로 미루고

탁족(濯足)을 하러나갔다. 탁족이 무엇이던가. 탁족이란 말은 글자그대로 발을

씻는다는 뜻인데 조선의 선비들은 관념 속에서가 아니라 실제로 강과 계곡에서

탁족의 풍류를 즐겼다. 조선 시대의 세시 풍속을 기록한 《동국세시기》유월조(六月條)에,

“삼청동 남북 계곡에서 발 씻기 놀이를 한다.” 

(三淸洞……. 南北溪澗 爲濯足之遊)는 기록이 있다.

《동국세시기》가 당시의 풍속을 기록하고 있는 문헌이라는 점에 비추어 보아

탁족놀이가 일부 특수 계층의 전유물이 아니라 일반인들 사이에 널리 유행했던

여름 풍속 가운데 하나였다고 생각된다. 사람들이 탁족에 관심을 갖게된 것은

중국 고전인 《초사 楚辭》의 내용과 관련이 깊다. 《초사》 어부편(漁父篇)을 보면

어부와 굴원(屈原) 사이의 문답을 서술한 마지막 부분에,


 “어린아이가 노래하기를, ‘창랑의 물이 맑으면 내 갓끈을 씻을 것이요,

창랑의 물이 흐리면 내 발을 씻으리’[滄浪之水淸兮 可以濯我纓 滄浪之水濁兮 可以濯我足]"

라는 구절이 있다.


 후세 사람들은 이 부분을 특별히 〈어부가 漁父歌〉,

또는 〈창랑가 滄浪歌〉라 이름 지어 불렀는데, 이 노래에 나오는 ‘탁족’과 ‘탁영’이라는

말을 특별한 의미로 새겼다. 즉 세상의 부귀영화에 얽매임이 없이 자연에 순응하면서

순진무구한 아이들처럼 맑고 초연하게 살아감을 비유한 것이다.

창랑의 물이 본래대로 맑을 때에는 사람들이 갓끈을 담가 씻고,

더러워지면 또 더러워진 대로 발을 담가 씻으니, 물이 맑거나 흐리거나

다 씻을 것이 있게 마련이라는 뜻이다.

이 문장에서 넉 자를 떼어 '탁영탁족'이란 성어로 굳어진 것인데,

지금은 세속을 초월해 살아간다는 뜻으로 의미가 확대되었다.

또한 《맹자(孟子)》, 이루(離婁)편에서는 <창랑가〉의 의미를 행복이나 불행은 남이

그렇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자기 스스로의 처신 방법과 인격 수양 여부에 달려 있다는

뜻으로 풀이하기도 하였다. 즉 세속을 초월하는 것보다 인격수양 쪽에 방점을

크게 찍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런가하면, 오늘날 권영희 시인은 <탁족濯足>이란 시에서 탁족광경을 그림처럼 묘사해낸다.


 풀꽃들 옹기종기 하얀 햇살 꺾어 들고/징검돌 치맛단 올리며 물빛 퉁기는 냇가/

 혼자 큰/탁한 마음이/시린 발을 담근다.

 

 황동규시인의 ‘탁족’이란 시에서는 현대인의 정감에 한걸음 더 현실적으로 다가온다. 


휴대론 안 터지는 곳이라면 그 어디나 살갑다/아주 적적한 곳/

늦겨울 텅 빈 강원도 골짜기도 좋지만,/알맞게 사람 냄새 풍겨 조금 덜 슴슴한/

부석사 뒤편 오전약수 골짜기/벌써 초여름, 산들이 날이면 날마다 더 푸른 옷 갈아

입을 때/흔들어도 안터지는 휴대폰/주머니에 쑤셔 넣고 걷다 보면/

면허증 신분증 카드 수첩 명함 휴대폰/그리고 잊어버린 교통범칙금 고지서까지/

지겹게 지니고 다닌다는 생각!


시냇가에 앚아 구두와 양말 벗고 바지를 걷는다/팔과 종아리에 이틀내 모기들이 수놓은/

생물과 생물이 느닷없이 만나 새긴/화끈한 문신들! /

인간의 손을 쳐서/채 완성 못 본 문신도/

그대로 새겨 있다/요만한 자국도 없이/

인간이 제풀로 맺고 푼 것이 어디 있는가?


황동규 시인의 이 시를 읽다보면 탁족하는 행위에 대한 진한 느낌이 가슴속으로 스며든다.

오늘 하루라도 잠시 휴대폰을 끄고, 양말도 벗어던지고,

남을 의식하지 않는 시간을 가져보는 것도 오늘의 신선이 되는 방법이 아닐까......


여름!

무더위!

주변에서 들려오는 온갖 세속적인 소리!

현세에 몸담고 살다보면 듣기 싫어도 들어야 하고

억지로 들어줘야하는 소리도 있을터...


잠시 그 버거운 삶의 무게를 내려놓고

중복인 오늘은 홍유손의 이 시와 이경윤의 탁족도 그림을 벗삼으면서

우리네 조상님들이 했던 방식대로 탁족을 해 보는 것도 피서의 한 방법일 것이다.


 

  홍유손(洪裕孫) 1431(세종13)~1529(중종24)


조선 초기 문인. 자는 여경(餘慶), 호는 소총(篠叢)·광진자(狂眞子). 본관은 남양(南陽).

문장에 능하여 부역을 면제받고 김종직(金宗直)의 문인으로 지냈다.

세조(世祖)의 왕위찬탈 이후 세속적 영화를 버리고 시주(詩酒)로 세월을 보냈다.

1482년(성종 13)부터는 남효온(南孝溫)·이총(李摠) 등과 함께

죽림칠현(竹林七賢)을자처하고 노장(老莊)의 학문을 논하여 청담파(淸談派)로 불렸다.

1498년(연산군 4) 무오사화(戊午士禍)에 연루되어 제주도에 노예로 유배되었다.

1506년 중종반정(中宗反正)으로 풀려났다.


  

 

제강석(題江石)-홍유손(洪裕孫)

강가의 돌을 읊다-홍유손(洪裕孫)

濯足淸江臥白沙(탁족청강와백사) : 맑은 강에 발 씻고 백사장에 누우니

心神潛寂入無何(심신잠적입무하) : 마음과 정신이 고요해져 진경에 들었도다

風敎浪長大暄耳(풍교랑장대훤이) : 바람은 풍랑을 길이 시끄럽게 할 뿐

不聞人間萬事多(불문인간만사다) : 인간만사의 온갖 일은 듣지도 못한다

 

 

[洪裕孫]

1431(세종 13)~1529(중종 24).
조선 전기의 시인.
본관은 남양(南陽). 자는 여경(餘慶),
호는 소총(篠叢)·광진자(狂眞子). 아버지는 순치(順致)이다.
문장에 능해 당시 남양부사였던 채수(蔡壽)가 향리의 역(役)을 면하게 해주었다.
김종직의 문인이었다고 하지만 아전 출신이다.
세조 찬위 후 세속의 영화를 버리고,
1482년(성종 13)부터 남효온·
이총·이정은·조자지 등과 모임을 갖고 죽림7현을 자처했다.
노자와 장자를 논하며 술과 시로 세월을 보내 청담파로 불렸다.
김수온·남효온·김시습 등과는 특히 자주 어울렸다고 하는데,
홍유손만큼 시를 지을 수 있느냐며
김시습이 서거정에게 비아냥거렸다는 말도 전한다.
1498년(연산군 4) 무오사화 때 제주에 유배되고
노예가 되었다가,
1506년 중종반정으로 풀려났다.
76세에 처음으로 장가를 들어 아들을 하나 둔 뒤
명산을 편력했는데 어디로 갔는지 알 수 없다고 한다. 저서에 〈소총유고〉가 있다.

 

76세에 처음 장가들고 99세까지 장수한  홍유손

 조선시대 하면 사내아이는 보통 10세를 넘으면 장가를 가게 되는데,  무려 76세의 죽을 나이에

 첫장가를 가고 아이를 얻었다는 기록이 있다.  

 장본인은 홍유손.그는 소위 죽림칠현으로 속세를 떠난 청담파를 자처하는 인물이다.

 76세에 장가를 들어  아들 지성을 낳고  99세까지 살다간 조선시대 기인중의  한명이다.

 같은 죽림칠현이자  생육신 이었던 남효온은  그를 평해 [글은 칠원같고 시는 산곡을 누빈다]

 고 하였다.

 그는 거의 기인에 가까웠으며 특히 세조가 정권을 잡은후 김시습, 남효온, 등과 어울리면서

 세상을 비관하고 냉소로 일관하면서 풍자적인 인생을 살았다.

 99세의 천수를 누린 그는 역사 인물사전에 나오는  최장수 인물이 되고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