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시.한시.

기대승의 종필[마음 가는대로 쓰다]

미르뫼 2012. 6. 19. 18:56

기대승의 종필

 

                                                                                                   소수서원 취한대

 

 

 

縱筆(종필-마음 가는대로 쓰다)

 

                                                               奇大升(기대승)

 

 

               淸風動萬松 청풍동만송 맑은 바람에 소나무들 물결치고

               白雲滿幽谷 백운만유곡 흰 구름은 그윽한 골짜기에 가득하구나.

               山人獨夜步 산인독야보 산에 사는 사람 혼자 밤에 걷노라니

               溪水鳴寒玉 계수명한옥 개울물은 찬 옥구슬 구르듯이 소리내며 흐른다.

 

 

 

  * 맛보기 *

 

 이 시는 고봉이 산에 머물면서 소나무, 개울물을 보면서 느낀 자연예찬을 그려낸 한 폭의 그림이다. 고상한 감성으로 그려낸 고봉의 이 시를 보면 한 편의 동양화를 보는듯하다. 근경에 맑은 바람에 일렁이는 소나무숲이 있고, 원경으로 내려다보면, 골짜기에는 흰구름이 가득하다. 다시 시각에서 청각으로 시적화자의 관심은 옮겨진다. 밤중에 산길을 걸을 때 들리는 졸졸졸 흐르는 개울물 소리는 옥구슬 흐르는 소리와 같다고 말한다. 즉 시각과 청각을 동원해서 자연이 주는 경이로운 풍경과 영혼에서 우러나오는 울림을 잘 그려내고 있다.

 

 아름다운 자연을 아름답게 보려면 보는 사람의 마음이 아름다워야 한다. 최근 서예세상 카페에서 부석사와 소수서원에 답사를 다녀온 뒤 많은 서우들이 영롱한 답사후기를 다투어 올리고 있다. 그 글을 보노라면, 시심에 젖은 서우들의 마음을 읽을 수 있다. 따라서 자연은 우리의 위대한 스승이라는 생각을 굳히게 된다. 개인적으로는 청송의 푸른 소나무숲을 잊을 수 없고, 울진 불영계곡의 시냇가, 해인사 홍류동의 계곡물, 대원사 앞의 계곡물 등이 눈에 어른거린다.

 

 이 시에서도 자연을 노래하면서 마음을 닦고, 그 마음으로 학문과 정사를 펼친 선비의 고고한 정신세계가 느껴진다. 특히 기고봉은 이퇴계와 격의 없는 학문적 논쟁을 펼친 것으로 유명하다. 우리는 논쟁이라면 서로 얼굴 붉히며 싸웠을 것으로 생각하지만, 조선 중기 영남의 거유였던 퇴계와 호남의 신진 유학자 고봉의 관계는 그렇지 않았다. 나이 차이가 있었음에도 퇴계선생은 고봉을 통유라고 하면서 존중했다. 아들정도의 나이인 고봉의 주장에 귀 기울인 퇴계선생의 학자적인 겸손한 면모와 후학을 아끼는 인품을 알 수 있다. 고봉 또한 퇴계선생을 평생의 스승으로 모셨다. 퇴계선생이 벼슬을 그만두고 안동으로 내려갈 때 슬픈 마음을 읊은 시가 전해오는 것을 보면, 고봉 역시 훌륭한 인품의 소유자였음을 알 수 있다. 스승이 부재하다는 요즘 세태에서 귀기울일만한 아름다운 일이 아닌가 생각된다.

 

 

 고봉 기대승[1527(중종 22)1572(선조 5)]

 

 본관은 행주. 자는 명언(明彦), 호는 고봉(高峯존재(存齋). 아버지는 진()이다. 기묘명현(己卯名賢)의 한 사람인 증() 이조판서 문민공(文愍公) ()의 조카이다. 이황(李滉)의 문인이며, 김인후(金麟厚정지운(鄭之雲이항(李恒) 등과 사귀었다.

 

 1549(명종 4) 사마시에 합격하고 1551년 알성시(謁聖試)에 응해서 시험에 합격했으나, 준의 조카라는 사실을 안 당시의 시험관 윤원형(尹元衡)의 방해로 낙방했다. 1558년 문과에 응시하기 위하여 서울로 가던 도중 김인후·이항 등과 만나 태극설(太極說)을 논하고 정지운의 천명도설(天命圖說)을 얻어 보았다. 식년문과에 급제한 뒤 승문원부정자에 임명되었다. 그해 10월 이황을 처음으로 찾아가 태극도설(太極圖說)에 관한 의견을 나누었다. 이황과의 만남은 사상을 형성하는데 있어 커다란 계기가 되었다. 그 뒤 이황과 12년 동안(1558~70) 학문과 처세에 관한 편지를 주고받았다. 그 가운데 1559년에서 1566년까지 8년 동안에 이루어진 사칠논변(四七論辯)은 조선유학사상 깊은 영향을 끼친 논쟁이다.

 

 1562년 예문관검열 겸 춘추관기사관을 거쳐 15633월 승정원주서에 임명되었다. 1565년 이조정랑을 거쳐, 이듬해 사헌부지평·홍문관교리·사헌부헌납·의정부사인을 두루 지냈다. 1572년 성균관대사성에 임명되었고, 이어 종계변무주청사(宗系辨誣奏請使)로 임명되었다. 공조참의를 지내다가 벼슬을 그만두고 고향으로 돌아가던 중 그해 11월 고부에서 병으로 45세의 짧은 삶을 마쳤다.

 

제자로는 정운룡(鄭雲龍고경명(高敬命최경회(崔景會최시망(崔時望) 등이 있다. 1590(선조 23) 종계변무의 주문(奏文)을 쓴 공으로 광국공신(光國功臣) 3등에 덕원군(德原君)으로 추봉되고, 이조판서로 추증되었다. 저서로는 논사록·주자문록 朱子文錄·고봉집등이 있다. 광주의 월봉서원(月峰書院)에 제향되었다. 시호는 문헌(文憲)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