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성[수성]나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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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르뫼 2014. 9. 24. 22:37

 

우리나라의 성씨 역사와 유래

 

단군은 우리 한(韓)민족이 세운 나라의 첫 임금
천제(天帝) 환인(桓因) 손자이며 환웅(桓雄) 아들
BC 2333년 아사달에 도읍을 정하고 고조선을 개국

엄밀히 따져, 한(韓)민족은 한 핏줄이 아니고
유사 종족, 동일 언어권을 갖고 있는 민족 연합.
한반도에는 옛부터 외국인이 귀화한 성씨도 많다.

'한반도 250 성씨 중 130 성씨는 귀화성씨.'

특히, 고려시대에 가장 많은 외국인들이 귀화.
외국인이 귀화하기 시작한 시기는 삼국시대 초,
그당시는 주로 수(隋), 당(唐)의 중국인이었다.

고려시대 귀화인은 송나라 사람을 비롯
여진, 거란, 베트남,몽골, 위구르, 아랍

이조시대에는 명나라와 일본인 등 많은 외국인이 귀화.
이들이 귀화한 동기는 대체로 정치적 망명, 표착(漂着),
종교홍포(宗敎弘布), 투항(投降), 구원(救援), 상사(商事),
전란피란, 범법도피, 정략결혼, 왕실 시종관계(侍從關係) 등

귀화인들은 대개 당시 조정으로부터 융숭한 대우
왕으로부터 성명을 하사받은 사람도 적지 않았다.

우리나라 외래 귀화 성씨를 크게 나누면
중국계, 몽골계, 여진계, 위구르계, 아랍계,
베트남계, 일본계의 등으로 분류 할 수 있다.


柳(문화 유씨.고조선)
車(연안 차씨.고조선)
全(천안 전씨 등 28본.고조선)

趙(평양 조씨 등 5본. 고조선)
南宮(함열 남궁씨. 기자조선)
景(태인 경씨.기자조선)

琴(봉화 금씨.기자조선)
强(충주 강씨.기자조선)
魯(밀양 노씨등 9본.기자조선)

弓(토산궁씨.기자조선)
韓(청주 한씨.마한)
奇(행주 기씨.마한)

鮮于(태원 선우씨. 마한)
徐(달성 서씨 등 10본.마한)
余(의령 여씨.마한)

徐(남양 서씨.당에서 신라)
徐(당성 서씨.신라)
徐(절강 서씨.명나라-정유재란)

소소계 : 18성 63본관

.......삼국시대 이전 귀화성씨...........
李(고성 이씨.BC108년)
羅(금성 나씨 등 15본.BC 200)
張(울진 장씨.전한)
蘇(진주 소씨. 원삼국)
.........소계 : 4성 18본...........

......삼국시대 귀화성씨...........
都(성주도씨.고구려)
黃(평해황씨 등4본.28년)
姜(진주강씨 등 3본.598)

金(진도김씨.265년)
庾(무송유씨.4세기)
孫(안동손씨.5세기)
.....소계 : 6성 11본..........

......통일신라 귀화성씨.........
李(연안이씨.660년)
丘(평해구씨.663년)
嚴(영월엄씨.750년께)

盧(광산노씨 등 9본.755년)
白(수원백씨.780년)
周(상주주씨 등 2본. 786년)

南(의령남씨 등 17본.786년)
皇甫(영천황보씨.신라말)
安(죽산안씨 등 5본.807년)

張(안동장씨 등 48본.8세기)
呂(함양여씨 등 4본.877년)
孟(신창맹씨 등 2본)

崔(충주최씨.889년)
廉(파주염씨.907년)
李(성주이씨.미상)
辛(영산신씨 등 2본.미상)

成(창녕성씨.미상)
吳(해주오씨 등 14본.950년께)
.......소계 : 19성 125본........

.......당나라 8학사 귀화성씨........
元(원주원씨.643년)
魏(장흥위씨.649년)
洪(남양홍씨.649년)
房(남양방씨.649년)

徐(남양서씨.649년)
邢(진주형씨.649년)
方(온양방씨.669년)
卞(초계변씨.743년)

公(김포공씨.763년)
諸葛(남양제갈씨.836년)
林(평택임씨 등 8본.840년)
殷(행주은씨.850년)

司公(효령사공씨.897년)
宋(남양송씨.926년)
陸(옥천육씨.927년)
玉(의령옥씨. ?)

吉(해평길씨 등 2본. ?)
田(남양전씨 등 2본. ?)
....소계 : 18성 27본.........

....고려시대 귀화성씨....................
李(태안이씨.927년)
尹(무송윤씨.960년께)
韋(강화위씨.960년께)
表(신창표씨.960년)

連(전주연씨.고려 초)
禹(단양우씨.고려 초)
任(장흥임씨.정종)
池(충주지씨.960년)

劉(거창유씨 등 4본.고려 초)
杜(두릉두씨.1004년)
牟(함평모씨.현종 때)

李(안성.문종 때)
愼(거창신씨.1068년)
蔣(아산장씨. 예종 때)
鄭(서산정씨.예종 때)

沈(풍산심씨.1110년)
余(의령여씨.1120년)
毛(함평모씨(광주).인종때)

郭(현풍곽씨.인종 때)
具(능성구씨 등 18본.인종 때)
鞠(담양국씨.인종때)
夏(달성하씨. 인종 때)

宋(여산등4본.인종때)
魚(함종어씨.고려 중엽)
閔(여흥민씨.고려 중엽)
簡(가평간씨.의종)

于(목천우씨. 고려중엽)
桂(수안계씨.고려중엽)
章(창녕장씨.고려 중엽)
李(태원이씨.고려 중엽)

伊(은천이씨.고려 중엽)
陳(여양진씨 등 6본.고려중엽)
葉(경주섭씨.고종)
賓(수성빈씨.충렬왕 때)

朱(신안주씨 등 4본.1213년)
宣(보성선씨.1382년)
唐(밀양당씨.고려 말)
李(상산.고려 말)

明(연안명씨.1371년)
昇(창평승씨.1371년)
睦(사천목씨.고려)
墨(광령묵씨.고려)

凡(안주범씨.우왕 때)
燕(곡산연씨.고려)
芮(의흥예씨.고려)
陳(양산진씨등2본.공민왕)

秦(진주진씨.고려)
溫(금구온씨 등 2본.고려 말엽)
尙(목천상씨.미상)
.......소계 : 50성 84본.....


..........몽골계 : 연안 인씨(延安 印氏)..................
시조 인후는 1275년 제국공주를 따라 고려에 귀화.
평양군, 자의도첨의사사를 거쳐 검교정승을 지냈다.
아들 인승단이 충목왕 때 좌정승으로 연안부원군에 봉
...........................................................

여진계 : 청해 이씨(淸海 李氏)
일본계 : 우록 김씨(友鹿 金氏 : 사성 김해 김씨)

...........위그루계 : 경주 설씨(慶州)..............
원효대사 아들 설총이 시조로 되어있는 경주 설씨.
신라 왕실에서 경주 설씨를 하사받은 위구르 귀화인.
......................................................

...............아랍계 : 덕수 장씨(德水 張氏)............
평택시 팽성읍은 600년전 고려에 귀화한 아랍인 마을.
고려말 의랑 벼슬을 지냈던 덕수 장씨의 중시조 장우.
아직까지도 팽성읍의 주민 70%는 덕수 장씨인 집성촌.
이조로 정권이 바뀌어도 고려를 향한 충절을 지킨 가문.
............................................................

...............베트남계 : 화산 이씨(花山 李氏)..............
13세기 초 고려 고종 때 안남국(安南國. 현 베트남)의 왕
이천조가 트란 왕조에게 권력을 빼앗기자 둘째 왕자 이용상
1226년(고려 고종 13년) 배타고 황해도 옹진군 화산으로 피난.

고종은 이를 가상히 여겨 화산군에 봉하고
그곳을 식읍으로 하사하여 화산 이씨가 유래.
국수, 쌈, 목기.등 한반도 문화에 큰 영향력.
.............................................................

밀양 대씨는 패망 발해 후손들이 밀양에 정착.
우리나라의 성씨는 275성이고, 본관은 3349본.
우리나라에서 100만명 이상 성씨는 5 개 성씨

'김해 김씨, 밀양 박씨, 전주 이씨 등.'

귀화 성씨로는 기자(箕子)를 시조로 모시는 여러 성씨들
희귀 귀화성씨 대부분 역사적인 사건과 관련있는 성씨들

천녕 견씨(川寧 堅氏)가 대표적인 그러한 사례.

왕건이 후백제 견훤의 아들 신검을 토벌할 때
고려 대상(大相) 견권을 시조로 모시고 있었다.

아자개를 시조로 모시는 견씨
견훤을 시조로 모시는 견씨 등.

대구시 달성군 가창면 우록리 녹동서원 옆
김충선 기념관(임진왜란 당시 귀화한 왜장).

희귀 성씨 중에는 옛 외국 왕족의 성씨도 많다.
개성 내씨(開城 乃氏)는 원래 개성 왕씨였는데,
이조 개국후 탄압을 피해 개성 내씨로 바꾼 성씨.

밀양 대씨(密陽 大氏)는 발해의 국성(國姓)에서 유래.
시조 대중상(大仲象)은 그 아들이 대조영(大祚榮)이다.
발해가 망한 후 그 후손이 경남 밀양에 정착한 귀화성씨.

역사적인 사건과 관련 있는 귀화 성씨들도 참 많다.
개성 노씨 시조 노은경(路誾儆)은 원나라 한림 학자
고려 공민왕 때 노국대장 공주를 따라와 개성에 정착

강음 단씨(江陰 段氏)의 시조 단희상
임진왜란 때 명나라 구원병으로 왔다가
이조에 귀화해 강음에 정착한 귀화 성씨.

임진왜란 때 가등청정(加藤淸正)의 부장 김충선(金忠善)
사야가는 귀화 후 선조로부터 김충선이란 이름을 하사받고
'진주 목사' 장춘점(張春點)의 딸을 아내로 맞아 들였다.

연안 인씨(延安 印氏) 시조 인후는 몽골인
아들 인승단이 충목왕 때 연안 부원군에 봉.

온양 방씨(溫陽 方氏) 중간 시조로 알려진 방운
고려 성종 때 온수(온양)군에 봉해지자 온양을 본관
남양 방씨는 고려 때 벽상공신을 역임한 방계홍을 1세
개성 방씨도 고려 때 원나라 노국 공주를 따라 온 방두현
각각 방씨 시조로 삼고 있다는 점에서 모두 천계는 아니다.

지씨의 대표격인 충주 지씨(忠州 池氏) 지용수(池龍壽)
고려 공민왕 때 홍건적을 물리친 공으로 일등공신에 책록

두 글자 이상을 쓰는 복성(複姓) 중 남궁(南宮)
독고, 사공(司空), 선우(鮮于) 제갈(諸葛) 황보(皇甫)

그 외 51명의 연안 단(單)씨와 36명의 한산 단(端)씨 등
교동 뇌씨(喬桐 雷氏)는 강화도 교동이 연산군을 비롯해
여러 선비들의 귀양지였다는 점에서 귀양 갔던 선비의 후예.

우리나라 성씨에 관한 족보를 보면
삼한시대의 형성과정이 보이는듯.

...............삼한시대부터 한반도 성씨 유래..............................
기자조선 영역은 요하 하류, 해성, 압록강 중류, 청천강 상류
B.C 3세기 흉노족에게 시라무렌하 영역을 잃고 연 한 진 때 쇠퇴.

기자조선 후예는 행주 기씨 , 서씨 , 태원 선우씨 , 청주 한씨
그외 해주, 태인 경, 토산 궁(弓), 봉화 금, 밀양, 함평 노(魯)

고구려 고씨(高句麗 高氏)·
백제 여씨(百濟 餘氏) ·
신라 김씨(新羅 金氏) 주류.

고구려는 을(乙)·예(禮)·송(松)·목(穆)·우(于)·주(周)·
마(馬)·손(孫)·동(董)·예(芮)·연(淵)·명림(明臨)·을지

백제는 사(沙) · 연(燕)·협(협)·해(解)·진(眞)·국(國)·목(木)
묘(苗)·왕(王)·장(張)·사마·수미(首彌)·고니(古이)·흑치(黑齒)

신라(新羅)는 박(朴)·석(昔)·김(金)·이(李)·
최(崔)·정(鄭)·손(孫)·배(裵)·설(薛)·요(姚)

우리나라 성씨의 유래는 백제 근초고왕 4세기 초.
그 이유는 그 이전까지는 모계사회 풍습이 있었고
그 이후부터 한반도에 부계사회가 뿌리내렸던 때문.

한반도 성씨는 중국 고대 패망 왕조 국가를 총 망라.
즉, 중국에서 이주해온 유민들이 그만큼 많다는 증거.
백성이란 100 성씨 씨족들이 모여 이룬 나라의 구성원.

씨족마다 풍습 문화이 다르고 가옥 구조도 천태만상.
한반도는 고대 국가, 8도 지방마다 색다른 가옥구조
전세계에서 가장 천태만상 가옥 전시장 같은 한반도.

.................우리나라 주거환경 특징................
구석기시대 인간은 동굴이나 바위틈 그늘에서 살았다..
그후 나뭇가지 원추형 뼈대와 나뭇잎 등으로 만든 가옥.

제 4 빙하기 이후 신석기시대에는 가축을 기르고 농사
집단 공동생활을 하기 시작하며 반 지하 타원형 주거지.
원형, 타원형, 방형으로 바뀌었고, 말기에긴 네모꼴 형태.

청동기 시대(B.C 10세기경)에는 나즈막한 언덕에 10∼20호.
많게는 100호 정도의 마을을 형성하며 농경 어업 또는 목축.
주거지가 커졌으며 기거, 취사, 작업, 저장 등으로 나뉜 벽체

고조선 시대 움집은 지하를 깊게 파고 기둥을 세워
서까래를 걸쳐 지붕을 짜고 풀 흙 등을 덮은 주거지.
지붕이 땅에서 떨어지는 반 움집의 형태가 생겨났다.

이때 비로소 여자는 안쪽 깊은 곳을 차지하고
중간은 작업실, 입구는 남성 및 야외 생활도구

고구려 주거지는 온돌과 지붕에는 기와를 사용했다.
백제는 고구려와 유사했고 산 중턱에 살았다는 기록
신라는 기후가 따뜻한 지방이므로 평상 위에서 생활

고려는 백성은 움집 형태였고 귀족은 기와집 형태.
이조시대에는 고려 때 주거지 구조를 그대로 계승
목조가구식 온돌과 마루가 있는 민도리집 양식이다.

이조 건축은 규모가 작고 검소하면서 위엄을 갖췄다.
건물 자체의 균형 뿐만 아니라, 주위 환경과의 조화.
..............................................................

'족보는 전 세계에서 가장 잘 정돈된 우리나라.'

2천년 혈통을 족보로 만들어 대물림한 유일한 나라.
현재 국립 중앙도서관 자료실엔 600종, 13,000권 소장
원래 중국 6조(六朝)시대에 시작된 족보는 왕실 계통 기록.

한반도에서 족보가 보편화된 시기는 1565년(조선 명종20년) 이후
<문화유씨 가정보>에 민족혈통을 수록하자 명문가문도 족보 간행
17세기 이후에 여러 양반 가문들이 다투어 족보를 만들기 시작했다.

이조 초기에 간행된 족보 대부분은 관계 자료를 충실히 보완한 내용.
이조 중기에 들어서자 조상을 미화하고, 조상벼슬을 과장하거나 조작.
심지어 명문 가문의 족보를 사고 팔거나, 훔치는 경우도 있었다고 한다.

한편, 사대주의 사상에 물들어
중국에서 유래된 족보도 많았다.

이조시대 초기까지만 해도 양반은 국가의 지배 계층.
이조시대 후반부터 양반 계층 숫자는 점점 더 늘어난다.
양반 상민의 신분격차가 없어질 무렵 너나 없이 양반 주장.
이조시대 말기에는 매관매직, 족보를 사고 파는 행위도 성행.

'한반도에서는 언제부터 성씨를 쓰게 되었을까?'

우리나라 민족은 누구나 성씨를 사용하고 있다.
아울러, 그 성과 본관의 유래가 담긴 족보가 있다.
족보는 한반도의 역사 전통 사회구조 파악에 길잡이.

'고대부터의 혈연과 지연도 알 수 있는 족보.'

성씨는 출생 혈통 겨레(족) 소속집단 국가를 나타내는 호칭.
즉, 혈연집단인 씨족에서 비롯되어 소속 국가까지 알려준다.
하여 성씨는 거슬러 올라갈수록 그 뿌리가 하나로 모아진다.

성씨는 한자로 이름 앞에 붙여 본관과 함께 사용한다.
하여, 같은 성씨라도 혈연 관계가 없는 타 성씨와 구별.

성씨는 대대로 갈라져 같은 조상이라도 성씨가 달라지고
같은 성씨이면서도 그 조상이 혈연과 무관한 경우도 많다.
부 또는 모 성을 따르기도 하며 모성 변성, 사성, 자칭성 탓.

중국의 고대사회에서는 남자는 씨, 여자는 성으로 호칭했다.
즉, 부계사회는 씨를 사용했고, 모계사회는 성으로 호칭했다.

훗날 성씨가 합쳐졌고, 씨는 신분의 고귀함을 나타내는 호칭.
귀한 신분은 씨를 사용, 천한 신분은 이름만 있고 씨는 없었다.

고려 초기(10세기) 지배층이 부계 혈통을 표시하는 성을 사용.
성은 사회구성원이고 명은 개인을 가리키는 이름으로 씌여졌다.
하여, 성은 본관을 의미하고 씨는 높임 말의 의미로서 사용했다.
씨는 이조시대에 들어와 양반의 부인을 부를 때 경칭으로 씌였다.

한반도는 삼국시대 전후부터 성을 쓴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한반도에서 중국식 한자 성을 쓴 시기는 고구려 장수왕 시대.

그당시 중국에 보내는 국서(國書)에 고(高)씨의 성을 사용했다.
백제는 근초고왕 때부터 여(餘)씨, 무왕 때부터 부여씨(扶餘氏)
신라는 진흥왕 시대부터 김씨 성을 사용했던 역사기록이 있다.

그러나, 한반도에서 누구나 모두 성을 사용한 것은 아닌 듯.
성씨(姓氏)가 보편화 된 것은 고려 중기 문종(文宗) 9년(1055)
성을 쓰지 않는 사람은 과거급제 자격을 주지 않는 법령 이후.

성씨 유래와 족보들을 보면, 한반도가 한 핏줄 만은 아닌 듯.
동아시아의 수많은 고대국가들로부터 유래된 성씨의 흔적이다.


서해 지역이 육지였던 시점에서부터 여러 민족이 살았던 한반도.
지구온난화 현상으로 빙하가 녹아 해수면 아래로 잠긴 서해 지역.

'그 저지대 민족들은 어디로 뿔뿔이 흩어졌을까?'

덧 말.

 

조선시대 초기에만 만해도 성씨가 있는 양반은 10%
조선시대 중기에 들어와 양반이 족보를 가지게 되면서
평민들도 구전 자료에 의하여 족보를 만들기 시작하였고
토착민들은 지역 별 동일 씨족으로 족보를 가지게 되었다.
 
집성촌을 이루지 못하고 생활한 유랑민이거나
원래 천민은 성씨없이 돌쇠,떡쇠, 개똥이, 삼돌이 등
 
성씨 없이 이름만 불리웠는데 조선후기에 양반 도움으로 
성 하나 만은 가지게 되었고. 1909년 일제가 민적법 시행시
성씨가 없던 천민들에게 원하는 성씨의 호적을 일제가 주었다.
 
그 때 가장 인기 있던 성씨가  "김이박 등.
 그래서, 유명한 성이 더욱 흔해지게 된 것.
 
일제가 성이 없던 밑바닥 천민(노비)계층에게
유명 성씨의 호적을 준 것은 조선 양반성씨들이
씨족별로 단결하는 것을 방해하기 위한 조치였다.
 
노비를 양민화 시켜
수탈 대상을 늘이기 위한
식민통치정책의 일환이였다.
 
일례로 김좌진 장군댁 노비 100명도
안동김씨 호적을 만들어 가졌다 한다.
 
조선시대 양반집 법도는 엄격한 유교의 윤리로
양반 행세하기는 행동거지가 참 어렵고 엄했다.
따라서 천민은 흉내낼 필요성을 느끼지 못는 사회
 
현재 품성과 관계없이 성씨로 양반입네 떠드는 사람은
양반집 "돌쇠"거나, 그 마을 "개똥이"였을 가능성이 높다.
 
양반은 따르는 권속들에 대한 책임감과
가문의 명예를 위해 중압감을 느끼며 생활
 
자신의 행동이 가문과 직결되었기 때문에
막된 행동이나 막말 등을 할 수가 없었으며
지역사회에서 한번 쌍놈의 가문으로 찍혀지면
자녀 출가와 직결될 만큼 성씨가 품행을 구속했다
 
법도와 예의를 생명같이 여기고 산 이유도 여기에 있다.
이런 점에서 양반 사회는 순기능 역활도 했다고 판단된다. 

 

   태극기에 관한 모든 정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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면 화

백 의

색 정

은 신

태 단

극 일

원 의

형 정

은 신

청 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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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 의

양 정

은 신

건 무

곤 궁

양 의

괘 정

는 신

이 광

감 명

양 의

괘 정

은 신

 

 

 

 

 

 

                      

태극 도형은 반만년 역사속에 우리 민족과 함께 숨쉬어온 정신적 상징입니다.

1.

태극도형은 삼국시대에도 사용되었음.

2.

태극기로는 이조시대 어기라하여 태극주의에 8쾌를 그려
넣어 어기로 사용한바 있었음.

3.

현재와 같은 태극주위에 4쾌가 그려진 태극기는 1874년 고려국기라하여

청국주재 미국인 공사에 의하여 청국에 소개된바 있음.

4.

1882년 8월(음)박영효가 수신사로 일본에 갔을때

대외공식적으로는 최초로 사용하였다 함.

5.

1883년 1월(음) 고종 20년 태극4쾌가 그려진 기를 국기로 사용토록

왕명으로 공포하엿으나
정확한 제작 사용방법등을 규정하지 않음.

6.

1949년 1월 대통령 특명으로 "국기시정위원회"를 구성한 이후

수차에 걸친 회의끝에 현행국기를 확정하였음

 

※ 당시 5가지 국기도안중 제 3안이 선정되었다.

① 제1안 구왕궁 소장안

② 제2안 군정문교부안

③ 제3안 우리국기 보양회안

④ 제4안 이정혁 건설안

⑤ 제5안 독립문 의거안

7.

1949년 10월 : 국기제작 방법공포(문교부고시 제2호)

8.

1950년 1월 : 국기게양방법공포(국무원고시 제8호)

9.

1966년 4월 : 국기에 관한건 공포(대통령 고시 제2호)

10.

1984년 2월 : 대한민국 국기에 관한 규정 제정공포(대통령령 제11361호)

11.

1987년 4월 : 대한민국 국기에 관한 규정 개정(대통령령 제12148호)
※ 국기강하시각 변경

12.

1989년 3월 : 대한민국국기에 관한 규정 개정(대통령령 제12642호)
※ 국기의 실내 게양방법 등 개선

13.

1996년 3월 12일 : 대통령령(제14943호)
※ 국기에 대한 맹세 전문 개정

14.

1996년 12월 27일 : 대통령령(제15182호)
※국기의 표준색도 및 국기게양방법 개정

 

 

 

마건충(馬建忠)이 제안한 태극도.
청(淸)나라 사신 마건충이 반홍, 반흑의 태 에

8를 그려서
조선(朝鮮)의 국기로 사용할 것을 제안하였나
고종(高宗)이 크게 노하여

새로운 태극기를 창안였다.

조선왕조 말기 정치인이었던

 박정양(1841~1904)이 서장하던 태극기.
1884년에 만든 것으로 추정되며,

그후 1900년 이화학당 4대 총장 쥬디씨가

똑같이 그려 사용하였고,
현재 스미스 소니언(Smith sonian)에서 구입,

소장(所藏)중이다.
현존하는 태극기 중 가장 오래된 태극기이다.

1886년 외교 고문이었던 데니시(Deny, Owen N)가 재임시

고종황제(高宗皇帝)로부터 하사(下賜)받은

태극기이다.
데니씨는 당시 조선왕조를 간섭하던 청(淸)나라를

신랄하게 비난하였던

미국인 외교고문(顧問)이었다.
태극기의 특징은 통상약장 태극문양과 비슷하나

음방과 양방의 위치가 다르며 몸체가 가늘고 길다.

1900년 무렵의 태극기로서 일본의 침략이

노골화 되자

이를 단호히 저항하면서 굳건히 항일운동을

펴자는 글이

태극기 양쪽에 새겨진 항일 독립운동 태극기이다.
일본이 이 태극기를 빼앗아 갔다가

1967년 반환하였으며

지금은 독립기념관에 소장(所藏)되어 있다.

 


 

 

 

맨처음 국기 이름은 '조선국기'

우리나라의 국기가 맨 처음 만들어졌던 조선왕조 시대 때에는

나라의 이름인 '조선'과 함께 '조선국기'라 불렀다.

당시 조선왕조를 나타내는 국가의 명칭이

'조선'이었기 대문에 붙여진 이름이었다.
1882년 최초의 국기가 만들어지고나서 1919년 3월 1일

독립만세 운동이 일어나기전까지

27여년 동안은 '조선국기'로 불리어져왔었다.

태극기라는 말의 유래

'조선국기'가 '태극기'라는 말이 나오기 시작한 것은

바로 1919년 3월 1일 민족대표 33인이 독립선언을 하던 때부터였다.

18세기 말엽 조선왕조는 관리들의 당파 싸움과 부정부패로

말미암아 나라 꼴이 허약해기기 시작하였다.

이런 기회를 노려오던 일본은

마침내 1910년 조선왕조를 송두리채 빼앗아갔다.

이에 격분한 애국자들은 죽음을 무릅쓰고 독립운동으로 일본에 맞섰다. 1919년 3월 1일 정오에 맞춰 서울 탑골공원에서 독립선언문 낭독과 함께 전국적으로 대한독립 만세 운동를 펼치기로 하였다.

이날 참여한 모든 국민들은 누구를 가리지 않고 손에 손에 '기'를 들고 나오기로 하고, '기' 제작을 하였는데,

그때만해도 '조선국기'로 부르던 국기 이름을

일본들이 알아차리지 못하도록 하기 위해 '태극기'로 부르자고

약속을 하면서부터 새롭게 퍼지기 시작했다.
이런 사실을 전혀 눈치 채지 못한 일본 경찰은

탑골공원이며 종로거리이며 동대문 성벽까지 가득 메운 인파들이

그렇게도 많은 태극기를 어디서 어떻게 만들었는지에 대하여

매우 당혹한 나머지 태극기를 든 사람이라면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닥치는대로 팔뚝을 자르는 등 끔찍한 만행을 저질렀다.


일본으로부터 독립을 하기 위해

우리나라 애국지사들은 중국에 대한민국 임시 정부를 만들고,

국기를 바라보며 독립 의지를 불태웠다.

해방되기 3년전인 1942년 3월 1일에는

한국 임시정부수립 23주년 3.1절 선언문을 발표하였는데,

거기에 국기 이름을 '태극기'로 정하고 그 존엄성을 명문화 하였다.

그 내용을 소개하면 이렇다.

 
「태극기가 국제적으로 사용된 것은 실로 1882년의 일이며,

그로부터 태극기는 한국의 독립주권을 표시하였다.

그러므로 3.1대혁명 발동에 있어서도 여전히 태극기를 썼으며,

그 깃발은 혁명군중의 선혈에 물든 채 적의 총검 위에 꽂혀졌다.

이처럼 태극기는

3.1대혁명의 발동을 위해서도 없을 수 없는 큰 힘이었으니,

한국 주권이 충분히 발휘될 수 있는 역사의 빛이

바로 여기에 있기 때문이다.
또한 태극기에는

부숴질 수 없는 존엄과 인상이 아로새겨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한국인 살고 있는 곳에는

반드시 한 폭의 태극기를 걸어 놓고 자신이 조국을 잊지 않고 있으며,

나라를 되찾겟다는 민족적 신조를 간직하고 있다는

결심을 표시하여 왔다.」

우리나라에서 국기 문제가 처음으로 나오기 시작한 것은

 1876년에 있었던 병자수호조약을 맺을 때 부터였다.

조약을 맺기 1년전에 일본은 우리에게 문호 개방과 통상을 요구하면서 강화도 초지진에 우리의 허락도 없이 군함 운요호를 정박시켰다.

 강화도를 지키던 우리 수비병대가 즉각 대포를 쏘며 대항을 했다.

이런 과정에서 군함 운요호에 게양된 일본기가 불타 버렸다.

이 사건은 이듬해 강화도 회담에서 우리정부를 궁지에 몰아 넣었다.

 즉, 군함을 허락없이 정박했다 하더라도 국가를 표시하는

일본기를 엄연히 게양 하였는데도 불구하고

포격을 하게된 이유를 따지자,

우리 정부는 속시원하게 대답할 길이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그때만해도

우리 정부에서는 국기라는 말 조차도 없었으며,

도대체 무엇을 국기라고 하는지 조차도 몰랐기 때문이다.

우리나라는 이때부터 국기의 필요성을 절실히 느끼게 되었다.

우리나라의 난처한 입장을 눈치 챈 중국은 황준헌이라는 사신을 통해

삼각형 바탕에 용을 그린 중국의 용기를 본받아

국기로 그려 사용할 것을 간섭하기도 하였다.

그후 우리나라와 중국은 아예 국기 만들기 연락 사신을 임명하여

수시로 접촉토록하였는데 우리나라측 사신은 이응준이었고,

중국측은 마건충이었다.

이때만해도 우리나라는

국기에 대하여 마땅한 식견을 가지고 있지 못한 터라

이미 대륙을 상징하는 용기를 가지고 있는 중국으로부터

간섭을 받지 않을 수가 없었다.

중국이 우리나라의 국기에 대하여 집요하게 간섭을 하게 된 까닭은

조선왕조의 땅 한반도를 속국으로 만들기 위해서였다.

 


우리나라에서 국기를 만들어야겠다고 나서게 된 것은

1875년에 있었던 일본 군함 운요호 사건 때문이었다.

일본은 일방적으로 우리의 문호를 요구하면서 허락도 없이

강화도에 그들의 군함 운요호를 무단 정박시켰다.

이에 격분한 강화도의 우리 수비병대는 즉각 대포를 쏘며 대응했다.
우리 수비병대와 일본군 사이에 몇 차례 불꽃튀는 교전이 벌어졌으나, 우리 수비병대는 신무기로 대항하는 일본의 군사력 한테는

더 이상 버틸 힘이 없었다.

우리 수비병대가 가지고 있는 대포의 사정거리는

멀리 나가봐야 칠백여 미터 정도였지만,

일본이 무장한 대포는 그 보다 몇배 멀리 나갈 뿐만아니라

명중률이 매우 높았다.

그러니 피해는 당연한 우리 수비병대가 클 수밖에 없었다.
우리 수비병대는 35명이 죽었지만

일본군은 겨우 2명 정도밖에 죽지 않았다.

이런 피해를 당하고도

우리는 일본에 대하여 보상 요구 조차하지 못했다.

오히려 일본이 더 피해 요구를 많이 해왔다.

그 이유로는 일본 군함 운요호에 게양되었던 일본기가

우리 수비병대의 대포에 의해 불타 없었졌기 때문이다.

일본군의 트집은 이러했다.

나라를 표시하는 국기를 달고 바다를 운항하는 모든 배들은

전쟁이나 약탈의 의사가 없는 것으로 약속되어 있는데,

강화도 수비병대는 그것을 무시하고 포격을 했고,

더군다나 나라의 얼굴이나 다름없는 일본기를

고의적으로 명중시켜 불태웠다는 주장이었다.

국기?

무엇이 그토록 중요하단 말인가?

우리로서는 도무지 납득할 수 없는 노릇이었지만

일본은 수비병대 35명의 목숨을 잃은 것 보다 더 분노에 차 있었다.

일본기를 대포로 쏘아서 불태운데 대한 응분의 사과와 보상이 없으면

정식으로 선전포고나 다름없는 행위로 간주하여

이에 대한 만반의 준비를 하겠다니 참으로 답답할 일이었다.

이유야 어찌되었던 우리 입장에서는

더 이상의 전쟁은 없어야겠다는 것이 솔직한 심정이었다.
정당한 방어를 하다가 오히려 피해를 더 입은 우리측이

일본기 하나 잘 못 건드려 낭패를 당하고 말았으니

이 보다 큰 망신이 어디있겠는가.

 

이 사건으로 말미암아

우리나라는 일본이 요구하는 보상과 함께 문호를 개방하겠다는

 수호조약을 맺게 되었고,

국기의 필요성을 수모와 함께 느끼게 되었다

◆심오한 한자의 세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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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심오한 한자의 세계


    어느 회사에서 직원들을 대상으로 사훈을 공모했다.

    여러 사훈 중 직원 투표 결과 1등을 한 것은......
    日職集愛 可高拾多. (일직집애 가고십다)
    ☞ 뜻 풀이: [하루 업무에 애정을 모아야 능률도 오르고 얻는 것도 많다]

 


 

      그랬더니, 경영자 측에서 다른 의견을 냈다.

      溢職加書 母何始愷. (일직가서 모하시개)
      ☞ 뜻 풀이: [일과 서류가 넘치는데, 애들 엄마가 좋아하겠는가]

 


 

      그래도 직원들이 굽히지 않자, 결국 사훈을 이렇게 정했다.

      河己失音 官頭登可. (하기실음 관두등가)
      ☞ 뜻 풀이: [물 흐르듯 아무 소리 없이 열심히 일하면, 높은
      자리에 오를 수 있다]

 


 

    사훈을 이렇게 정하니ᆢ 사원들이 이렇게 댓글을 달았다.

    鹽昞下內 (염병하내 ).
    ☞ 뜻 풀이: [세상의 소금이며 빛과 같은 존재이지만, 늘 자신을 낮춘다]
출처 : 재경 남정면 향우회
글쓴이 : 자연인(닉네임)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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