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성[수성]나씨

[스크랩] 금성나씨 姓鄕碑文의 역사 접목을 통한 二羅의 분석

미르뫼 2014. 4. 11. 13:15

금성나씨 姓鄕碑文의 역사 접목을 통한 二羅의 분석

 

 

첨부파일 금성나씨성향비문.hwp

 

글/나천수

 

 

1. 서두에

 

나주시가 1991년 전국 최초로 성향 공원을 조성하였다.

나주를 本으로 하는 많은 성씨들의 기념비 공원을 조성하였는데, 금성나씨 측에서도 성향비를 수립한 것이다.

 

여기에 써진 금성나씨 유래의 글을 필자가 역사에 접목하면서 해설 겸 분석을 해보겠다.

 

 

2. 금성나씨 성향비문 전문 게재

 

羅姓은 본시 祝融의 후예로 匡正公이 羅國에 봉해지면서 득성 하게 되였고, 한고조 때 珠公이 예장 땅 영주가 되면서 豫章 羅氏라 하니 중국에서는 예장나씨 일본이다.

 

당태종 때 상서좌복야로 있던 羅至强公이 고구려 정벌의 모이를 반대하고 망명길에 올라 황해를 건너 발라현 지금 나주에 박부하였다. 그후 신라 조정에 출사하여 左丞相에 오르고 자손들은 나주를 중심으로 포거하게 되였는데 효공왕 때에 이르러 賜貫 羅州羅氏라 하였다.

 

그러나 昭穆系統을 밝히기 어려워 연대 계승이 소명한 때로부터 爲始組 起一世하니 삼한공신 대광 금성부원군 휘 聰禮이시다.

근안컨대 고려사 열전에 "대장군 羅裕는 나주인이니 삼한공신 대광 총례의 十世孫也"라 하였다. 연고로 동방나성의 시조는 휘 총례이니 제족중 소위 安定 軍威 壽城 比安등의 나씨가 皆出於羅州에서 分貫하였다.

 

吾族은 여초로부터 규조가 대대로 빛나서 七大匡 二尙書 四府院君과 六封君을 받은 근역의 명문벌족으로 특히 의종 때 도첨의를 지낸 금성부원군 6世 國英은 말년에 정중부의 난을 피해 벼슬을 버리고 落鄕

(羅州)하여 스스로 戶長이 되셨고, 슬하에 대호군 仁謙과 상장군 守謙 형제를 두니 대호 군계의 9세 得璜은 방호사에 이어 형부상서에 오르고 아들 금성군으로 시호가 양절인데 충목왕 때 금서 신아동으로 이거하였고 서해도 안렴사를 지낸 13세 文奎는 문장과 행위가 한 세상의 으뜸으로 건봉강사 향하고 있다.

 

상장군계의 10세 仁松은 한림학사로 시호가 文節이고 충렬왕 때 도첨의를 지낸 珣은 금성부원군이요,

 

고려말 예문관제학을 지낸 불사이군의 수절신 15세 繼從은 동학사 삼은각에 배향되고 죽헌사를 세워 향하고 있다.

 

조선시대에 들어와 불사이군의 종훈을 지켜 영채된 듯 하였으나 성종11년 경자시에 10명이 나주골에서 합격한 경사를 노래한 錦城別曲 5장중에 羅渙興 羅慶源 형제 무고하고 羅振文 羅處光 始起家風하며 羅顯 나빈 사촌형제 共登蓮榜하니 景畿何如로다 하였다. 이어 중종 때 대과에 세번 장원하였고 호당을 거쳐 大司憲에 오른 송제공 世纘은 을사명현으로 시로가 僖敏인데 建松齊祠享하고 임진왜란 때 거북선을 만들어 매 해전에서 공훈을 세운 체암공 大用은 경기수사에 오른 선무공신으로 建昭忠祠享하고 정유재란 때에 협천군수 청류공 迪은 擧義討賊한 의병대장으로 一門三節이다.

 

이와 같이 현조들의 貫이 사승과 공과문적에 모두 나주인이라 하였고, 또 과방록에도 송제공을 위시하여 창주공 茂松 구화공 茂春 간암공 忠佐등이 역시 나주나씨로 기록되어 행세하여 왔으나 영조 4년(1728) 이인좌의 반란과 동왕6년 경술 흉변에 所祖를 달리하는 나씨와 一州同貫으로 인한 혼효의 협의를 피하기 위해 영조 23년 정모수보시(1747) 辯疑文을 부치고 나주의 고호가 금성이고 또 시조가 금성부원군이신 고로 移貫錦城하고 현재에 이르렀으나 이관당시 나주와 격조했던 각처에 산재한 제족 중에는 지금에 금성으로 수보는 하되 호적에는 의연이 나주로 되어있어 유감지사라 아니 할 수 없다.

 

우리 씨족은 조기 이래 자손들이 번영현달하여 36여세에 그 수 5만여에 이르고 濟濟多士로 인물이 연면불체하여 문과 59명, 무과 96명, 생진과 음사 570명이며 특히 경술국치 이후 항일독립 투쟁한 3.1운동민족대표 羅仁協과 羅龍煥이 있고 의열단의 羅錫鑄의사와 광복군의 나월환 장군 등이 있다.

 

그 외 각 방면에 현저한 學行勳業을 매거하기 어려워 계략만을 서술하는 바이다.

 

(소재지 나주시 성향공원)

 

 

단기 4324(서기 1991) 년 9월 15일

 

 

34세 갑 주 ( 甲 柱 )

전주후인 이 학 용 (李學庸)

금성나씨성향비건립위원회 세움

 

 

3. 역사에 접목하는 二羅의 뿌리 이야기

 

성씨 제도는 신라 때에 중국 성씨 제도를 수입하게 되었다.

고려 초기에 확립된 성씨와 본관제도는 당(唐)대의 제도를 따랐을 것으로 짐작되며, 신라 말의 최치원 및 고려 시대 문사들이 인물의 본관을 표기할 때 唐대의 郡望을 즐겨 쓰고 있었다는 데서도 그러한 주장이 뒷받침된다.

 

또한 고려 성종 11년(992) 군현의 별호(別號)를 정한 것도 당의 군망을 모방해서 본관 명을 미화하였던 것이다.

 

두 나씨 모두 득성의 유래는 같다.

즉, 羅姓은 본시 祝融의 후예로 匡正公이 羅國에 봉해지면서 득성 하게 되였고, 한고조 때 珠公이 예장 땅 영주가 되면서 豫章 羅氏라 하였으며, 예장나씨 一本이다.

 

 

두 나씨 모두 시조의 연원은 여러 설을 가지고 있다.

설이라는 것은 정확한 역사 입증이 어려운 것으로 다만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를 채록하는 정도의 수준이다.

 

역사에 접목이 될 수 있다면 시조는 전설이 아닌 正史의 하나인 것이다. 나주나씨 시조 富의 동도도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를 족보에 담아 넣은 것이다.

 

동도의 근거를 찾기 위해 중국을 방문하고, 주한 대만 대사관을 방문하였고, 중국 역사를 섭렵하여 동도의 가능성의 시기와 사건을 연구하였다.

 

나주나씨 시조 연원 설은

첫째, 북송 말기에 사행일원으로 고려에 와서 체류 중에 북송이 멸망하여 귀국을 포기하고 고려에 귀화한 이야기는 역사상황 논리에 맞는 것 같다.

 

둘째 설은, 중국 강서성 남창 일대(옛 예장군)에서 세거하는 나씨들 예장나씨대성보에 나오는 羅富라는 인물을 찾아낸 것이다.

나부의 족보명은 仁老이며, 字가 富로 북송 멸망 시기에 65세로 문무를 겸한 인물이었다고 한다. 그런데 부인의 장지는 족보상에 있는데, 정작 富 본인은 장지에 관한 기록이 없다는 점에서 동도설을 뒷받침한다고 꿰맞추고 있다.

 

65세 늙은이가 사행일원으로 와서 고려에 귀화하여 고려 여인과 결혼하고, 후손을 낳았다는 것은 가능성은 있다지만 시조 부의 인물 확인에 궁금증을 풀어 주기에는 빈약하다고 본다.

 

차라리 북송 말 사행일원으로 고려에 왔다는 정도가 순수해 보인다.

 

금성나씨 시조는 修譜상황을 보면 너무 흔들리는 시조의 이야기를 가지고 있다.

 

錦城羅氏 舊譜에는 駕洛國首露王9世孫 仇彦王이 新羅에 항복하자 신라왕은 귀순한 구언왕에게 신라의 羅자를 姓으로 하사하였고 후손 종례가 곧 나총례라 하였다.

김부식의 삼국사기에 보면 532년 구해(형)왕이 왕비와 노종(奴宗)·무덕(武德)·무력(武力)의 세 왕자를 데리고 신라에 투항하였다. 신라는 이들을 진골(眞骨)로 편입시키고, 본국을 식읍으로 삼게 해 주었다 는 기록을 찾을 수 있다.

 

그러나 어느 부분에도 김해김씨 구해왕(구형왕/구언왕)에게 나씨성을 賜姓한 것은 발견되지 않았으니, 금성나씨 측은 전래의 설을 그리 썼는지, 아니면 역사기록을 참조했는지는 필자는 알 수 없었다.

 

또 다른 설을 보면

당태종 때 상서좌복야로 있던 羅至强公이 고구려 정벌의 모의를 반대하고 망명길에 올라 황해를 건너 발라현(지금 나주)에 세거하였다는 이야기이다. 그 후 신라 조정에 출사하여 左丞相에 오르고 자손들은 나주를 중심으로 포거하게 되였는데 효공왕 때에 이르러 賜貫 羅州羅氏라 하였다.

그러나 昭穆系統을 밝히기 어려워 연대 계승이 소명한 때로부터 爲始組 起一世하니 삼한공신 대광 금성부원군 휘 聰禮이시다.

 

나지강이 동도한 것이 분명하다면 비록 중간 세계의 자료가 불충분 하더라도 나지강이 시조가 되어야 한다.

나지강의 동도설을 제기해 놓고 어떤 이유로 나총례를 시조로 한다는 것은 논리적으로 맞지 않다.

차라리 나지강을 시조로 하고 세계의 대를 확인할 수 있는 나총례를 후1세로 하면 되는 것이다.

 

효공왕 때에 이르러 賜貫 羅州羅氏라 하였다」는 표현은 신라의 왕을 연대 기준으로 한 것인데, 나지강이 동도 상륙한 곳이 백제 지역이고, 나총례도 후백제 지역의 호족세력 아니던가.

賜貫을 신라 효공왕이 한 것처럼 느껴진다. 그러나 실제는 나총례가 고려개국의 공신으로 고려 때에 賜貫을 받았으니 “고려 태조 때에 이르러 사관 나주나씨”라 표현해야 논리가 맞다고 본다.

 

사성, 사관은 왕으로 성을 받고, 왕으로부터 본관을 받는 것이다.

 

고려 초에 나총례가 받은 勳封은 벽상삼한공신에 錦城府院君이다.

봉군의 작호가 바로 賜貫의 본관이다. 그러므로 本 또는 本貫이 금성인데, 왜 나주라는 주장을 할까.

 

금성나씨 측에서는 본과 본관의 의미를 정확히 갈파치 못한 것 같다.

고려 초기의 본 또는 본관은 식읍 또는 녹읍의 관할 범위를 말한다.

고려태조의 지방 통치방편의 일환으로 토성분정 정책을 펼치는데, 지방호족 세력에게 봉군의 작호와 사성, 사관을 통해 지방을 다스리는 지배권을 주는 것이다.

즉 본관이라는 지명의 범위 내에서 徵稅와 負役을 부과하는 권한을 주는 것이다.

봉군의 작호는 반드시 封君을 하사받는 자의 본적지 지명을 배경으로 한다는 것이다.

금성부원군 나총례는 금성지역을 다스리는 지배권을 받았던 것이다.

부원군의 작호를 받았던 시기에는 금성 땅은 나주라는 지명으로 개칭되었기 때문에 나주부원군, 또는 나성군의 봉작이어야 논리적으로 맞는데, 시조 이후에도 계속 금성부원군, 금산군, 금성군의 봉작을 받았다고 하는 것은 논리에 맞지 않다.

 

본관은 국가로부터 주어졌는가? 스스로 칭하였는가?

고려초기에는 이 두 가지 경우가 모두 있었던 것으로 판단된다.

본관제도가 정착된 고려 초부터 조선시대까지는 양수척(揚水尺)과 같은 특수한 천인을 제외하고는 양민과 천민의 구별 없이 모두 본관을 갖고 있었다.

姓은 없어도 본관이 있었다 라는 말은 무엇인가. 이때의 본관은 혈통 의미의 본관이 아니라 징세 조역의 부담을 하는 거주지 즉 본적지였던 것이다.

당초에는 본관과 거주지가 대체로 일치하였으나, 지방 토성(土姓)의 상경종사(上京從仕)와 국가적인 사민(徙民) 및 유이민의 발생으로 인해 일치하지 않는 계층이 증가해갔다.

고려나 조선시대의 지방에서 올라온 귀족과 관료층은 대체로 본관과 거주지가 일치하지 않았다.

15세기 이후부터는 성을 바꾸는 행위는 극히 적은 반면, 본관을 변경하는 경우는 매우 많았던 것으로 나타난다.

만약에 혈통 의미의 본관이었다면 본관을 바꿀 수 있었겠는가.

 

예를 들어 고려 개국 공신 신숭겸(申崇謙)은 곡성사람이었지만, 고려 태조와 함께 평산으로 놀러가 그 곳이 좋았으므로 평산을 본관으로 하사 받았다는 것은 곧 평산을 식읍으로 받은 것이다.

고려는 효과적인 징세제도, 부역제도를 운영하기 위해 본관제도를 실시하였다고 볼 수 있다.

이와 같이 본관은 토성분정에 의한 지배권의 영역, 피지배자는 거주이전의 제한 영역으로 활용되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고려 때에 본 또는 본관이 「나주」라면 토성분정에 의한 지배권의 영역, 피지배자는 거주이전의 제한 영역이란 것이다.

결코 오늘날 성관 의미의 본관이 아니라는 것이다.

 

신라, 고려, 조선 시대 본관제는 본적지 의미, 출신지 의미, 지배권 지역범위의 의미, 징세, 부역의 지역 범위의 의미로 이해해야 한다.

 

오늘날 성관 의미의 본관은 조선 하반기에 정착 되었다.

각 성씨들이 족보 편찬을 하면서 혈통 의미의 본관이 정착된 것이다.

 

「"대장군 羅裕는 나주인이니 삼한공신 대광 총례의 十世孫也"라 하였다. 연고로 동방나성의 시조는 휘 총례이니 제족중 소위 安定 軍威 壽城 比安등의 나씨가 皆出於羅州에서 分貫하였다.」

 

나유가 나주인이라는 것은 본적지가 나주라는 의미인데, 금성나씨 측에서는 오늘날 안정나씨, 군위나씨, 비안나씨의 선대의 본적지가 나주였음으로 본관이 같으니 모두 나주나씨(오늘날 금성나씨)에서 분관하였다고 표현을 한 것이다. 어찌 본적지가 분관될 수 있겠는가. 封君으로 새로운 본적지(본관)를 지정받았다고 표현해야 맞다.

 

혈통 의미의 본관이었다면 어찌 함부로 혈통을 바꾸겠는가.

본관을 바꿀 수 있다는 것은 그것은 핏줄이 아니라 본적지 지명이기 때문이다.

 

과거 나씨의 본관이 무려 50여개나 있었다. 이 본관이 혈통 의미의 본관이었다면 어찌 혈통을 통합하거나, 자신의 혈통을 부정하는 본관을 바꿀 수 있겠는가.

 

이 점을 금성나씨 측은 몰랐던 것 같다.

본관과 성관이 일치되는 시기가 대체로 조선조 중, 하반기라 볼 수 있다.

본관과 성관의 지명이 일치되는 성씨는 혼란이 없었지만 불일치하는 금성나씨의 경우는 혼란과 혼돈에 빠질 수밖에 없었다.

 

지금도 혼란과 혼돈 속에서 과거 「본관 나주」를 「나주나씨」로 오해하고 있어서, 선대의 인물들이 오늘날 성관 의미인 본관이 나주로 기록 되어 있다고 지적하면서 모두 나주나씨라 이해하고 있다.

 

과거의 본적지 개념의 본관이 오늘날은 성관 의미의 본관으로 완전 바뀌어 정착되었기 때문에 한국 역대 인물 관리 인터넷 시스템(http://people.aks.ac.kr/index.aks)에서는 방목 등 고문헌 자료의 잘못된 기록은 후손들이 이를 수정 요청하여야 수정되는 줄 금성나씨 측은 모르고 있는 것 같다.

 

그러나 한 가문에서 「七大匡 二尙書 四府院君 六封君」을 배출하였다면 명문벌족이다.

 

조선 성종11년 경자 사마시에 10명이 나주골에서 합격한 경사를 노래한 錦城別曲과 송제선생 유집에 대해서는 별도로 분석 하고자 한다.

여기에는 엄청난 음모와 조작이 담겨져 있어 필자가 특별 관리코자 한다.

 

금성나씨 측은 본관과 성관이 일치하지 못했기 때문에 과거 「사승과 공과문적에 모두 본관이 나주로 되어 있고, 또 과방록에도 역시 나주나씨로 기록되어 있음」을 지적하였다.

 

예를 들어 문과 방목의 기록을 보면

1) 나세찬

자 비승, 호 송제, 생년 무오1498, 합격연령 31세, 본 나주, 거주지 미상, 부 나빈, 조부 나은제, 증조부 나계,

 

2) 나충좌

자 양필, 생년 무신 1728년, 합격연령 23세, 본 나주, 거주지 미상, 부 나경익, 조부 나재하

 

3) 나무송

자 수부, 호 창랑, 생년 정축 1577년, 합격연령 39세, 본 나주,

거주지 미상, 부 나덕용, 제 나무춘, 처부 송정순

 

4) 나무춘

자 가지, 호 구화, 생년 경진 1589년, 합격연령 33세, 본 나주,

거주지 미상, 부 나덕용, 조부 나율, 증조부 나집

 

이와 같이 예문관에서 조사한 합격자의 인적 사항이 자세히 기록 되어 있다.

여기에 本이 나온다. 본이 「나주」라고 기록 되었는데 이를 「나주나씨」라고 해석을 한 것이다.

고려 조선조 본관제를 이해하였으면 본은 본적지 의미인줄 알았을 것이다.

조선조 하반기부터는 본이 금성으로 기록된 방목을 볼 수 있다.

전술한바와 같이 방목의 원전은 고칠 수 없으나 한국역대인물 소개 사이트를 관리하는 한국학 중앙연구소가 운영하는 인터넷 시스템에 입력된 과방목의 인물 인적 사항은 후손들의 요청에 의해 수정됨을 알려 드린다.

 

영조 4년(1728) 이인좌의 반란과 동왕6년 경술 흉변에 所祖를 달리하는 나씨와 一州同貫으로 인한 혼효의 협의를 피하기 위해 영조 23년 정모수보시(1747) 辯疑文을 부치고 나주의 고호가 금성이고 또 시조가 금성부원군이신 고로 移貫錦城하고」라 표현하였다.

 

1728년 이인좌의 난에 연루된 羅崇大의 혈통인 나주나씨들은 당해 연도에 모두 처벌을 받았다. 연루되지 않은 사람들은 전혀 피해를 입지 않았다는 것을 조선왕조실록 영조 편에서 확인할 수 있다.

 

그런데 이인좌의 난이 평정된 후 19년에서야 혐의를 피하기 위해 이관하였다는 것은 이유는 되지만 때늦은 감이 있다.

오히려 一州同貫으로 혼란스러워 이관한다는 것이 논리적으로 맞는 것 같다.

 

타 성씨의 문집 고문서를 보면 많은 곳에서 본관 금성을 찾을 수 있다. 금성나씨 측에서 본관을 나주로 쓰고 있었다는 시기에도 고문서 기록은 금성의 본관으로 나타난다.

 

고문서 사례를 열거해 보자.

 

①우계집(牛溪集) > 우계연보 > [세계도(世系圖)] > 우계(牛溪) 성 선생(成先生) 세계도(世系圖)

 

5세 여완(汝完) -초명(初名)은 한광(漢匡)이며 이헌(怡軒)이라 자호(自號)하였다. 지원(至元) 병자년(1336, 충숙왕 복위 5)에 급제하여 벼슬이 창녕부원군(昌寧府院君)에 이르고 시호가 문정(文靖)이다. 홍무(洪武) 정축년(1397, 태조6) 1월에 별세하니, 향년이 89세였다. 묘소가 포천현(抱川縣) 왕방산(王方山) 아래 계류촌(溪流村) 묘덕암동(妙德庵洞)에 있다. 배위는 금성 나씨(錦城羅氏)로 경안택주(慶安宅主)에 봉해졌는데, 정순대부(正順大夫) 밀직사 지신사(密直司知申事) 천부(天富)의 따님이다.

 

②한수재집(寒水齋集) > 한수재선생문집 제31권 > 묘표(墓表) > 통우후(統虞候) 이공(李公) 덕일(德一) 묘표

공은 금성 나씨(錦城羅氏)에게 장가들었는데, 부인의 아버지는 생원 율(慄)이다.

 

③장암집(丈巖集) > 丈巖先生集卷之十四 > 墓誌銘 > 漆室李將軍墓誌銘

公配錦城羅氏。

 

여기에 기록치 않은 다른 고문서도 너무 많다.

금성나씨 측이 주장하는 시조 나총례부터 영조5년(1729년)까지 본관을 나주로 썼다는 말이 맞지 않다는 고문헌 글들이 이렇게 많다는 것이다.

 

이것뿐인가. 양측 대동보를 보면 조선조 초기 혼인에 의한 인적 기록에 나주나씨 측 족보에는 「거평인」으로 기록하였고, 금성나씨 측족보에는 「여황인 또는 여황나씨」로 기록 한 것을 발견할 수 있다.

移貫의 주장과 실제상황이 틀린 점이 여러 곳에서 발견된다.

 

필자는 고문헌에 기록된 금성나씨를 찾다가 오늘날 나주나씨 인물이 타 성씨 문헌에 금성나씨로 기록된 자료를 발견하였다.

 

그것은 李廷龜(1564-1635)가 편찬한 月沙(이정구의 號)集이다.

 

월사집(月沙集) > 月沙先生集卷之四十七 > 墓碣銘 > 海州牧使李公墓碣銘幷序에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配曰淑人錦城羅氏。輔德允明之女。

 

 

해주목사 이公은 이응기(李應麒)를 지칭한 것이다.

輔德 羅允明은 나주나씨 금양군파 叔聃의 둘째아들로 중종 때 문과합격하여 여러 벼슬을 지냈으며 세자시강원 輔德을 지냈기에 보덕의 명칭이 붙은 것 같다.

나주나씨 대동보 권지2, p32-33에는 允明의 사위 이응기(李應祺)로 기록되어 있다.

이응기는 1549년(명종 4) 사마시(司馬試)를 거쳐 1561년(명종 16) 식년시(式年試)에 병과(丙科)로 등제하였다. 그 뒤 봉교, 호조(戶曹) · 예조(禮曹) · 공조의 좌랑, 직강 · 사성(司成) · 경상도사 · 종부시첨정 · 사옹원정 · 예빈시정 · 통천군수 · 철원부사 등을 역임하였다. 1581년(선조 14) 평산(平山)부사(府使) 재임 중에 황해도구황어사(黃海道救荒御史) 김응남(金應南)으로부터 사무에 태만하다 하여 탄핵(彈劾)을 받기도 하였다. 그 뒤 장악원정을 거쳐 공주목사 · 해주(海州)목사(牧使) 등을 역임하였다.

분명 배위(配位)는 숙인(淑人) 금성나씨로 보덕(輔德)의 딸로 기록되어 있다.

 

금성나씨 대동보에서는 나윤명이 없는 것으로 보아 이중 등재된 인물은 아니다.

그렇다면 편찬자 이정구는 누구인가. 이정구는 1564년(명종19)∼1635년(인조13)대의 인물로 조선 중기 한문사대가(漢文四大家)의 한 사람이다. 22세에 진사하고 5년 뒤인 1590년(선조 23)에는 증광문과에 병과로 급제한 인물이다.

그렇다면 기록의 오류가 날 인물이 아니다.

그런데 이응기의 묘갈명에 본을 금성으로 쓴 이유는 무엇일까.

역사는 항상 이렇게 궁금증을 만들어 간다.

 

 

현재에 이르렀으나 이관 당시 나주와 격조했던 각처에 산재한 제족 중에는 지금에 금성으로 수보는 하되 호적에는 의연이 나주로 되어있어 유감지사라 아니 할 수 없다.」하였다.

 

양측 대동보를 보면 世系의 일부가 양 羅씨 어느 한쪽이 표절한 것을 발견할 수 있다.

세계의 일부는 물론 인물 개개인이 양측 족보에 등재되었다는 것은 어느 한쪽의 족보는 무엇인가 심각한 오해 내지는 위보의 냄새가 난다.

 

혈통이 아닌 사람을 굳이 붙잡을 필요가 없는 것이다.

이 부분은 장차 반드시 해결되어야 할 문제라고 본다.

 

우리 씨족은 조기 이래 자손들이 번영 현달하여 36여세에 그 수 5만여에 이르고 濟濟多士로 인물이 연면불체하여 문과 59명, 무과 96명, 생진과 음사 570명이며 특히 경술국치 이후 항일독립 투쟁한 3.1운동민족대표 羅仁協과 羅龍煥이 있고 의열단의 羅錫鑄의사와 광복군의 나월환 장군 등이 있다.

 

위 글에서 방목의 합격자 나씨들 전부를 넣은 통계이다.

이 중에는 오늘날 나주나씨, 금성나씨, 안정나씨가 섞여 있다. 그런데 모두 금성나씨 후손들이라고 주장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그것은 「本 羅州」이기 때문이다.

오늘날 금성나씨들의 방목의 기록 「본 나주」를 보고 이것이 바로 「나주나씨」인 것으로 해석해 버렸기에 이러한 혼란을 초례한 것이다. 그래서 5관 나씨가 모두 금성나씨의 후손이라는 주장도 나오게 된다.

<자료1>

방목의 기록으로 본 나주 거주 羅씨 합격자 현황/나주목지 발췌

구분

나주나씨

금성나씨

문과안

羅昶, 羅曜, 羅士愃, (羅藎國),

羅緯素, 羅宜素, 羅 礻宣, 羅晩成,

羅晩榮, 羅學素,

羅世纘, 羅經成, 羅藎國

사마안

羅守永, 羅昶, 羅暠, 羅曜, 羅雋,

羅光祖, 羅士愃, 羅曙, 羅晋孫,

羅士忱, 羅士惺, 羅士憬, 羅德明,

羅儆, 羅德潤, 羅僖, 羅亻黽, 羅允悌, 羅海鳳, 羅宜素, 羅信德, 羅緯素,

羅元吉, 羅天老, 羅天鼎, 羅海崙,

羅襻, 羅俊, 羅袡, 羅休, 羅袗, 羅偃, 羅祜, 羅斗三, 羅褘, 羅斗章, 羅重器, 羅天樞, 羅晩相, 羅斗春, 羅晩榮,

羅斗冬, 羅天衡, 羅以柱, 羅晩恒,

羅天心, 羅斗徽, 羅斗一, 羅以櫶,

羅燦奎, 羅允尙, 羅斗鎭, 羅廷一,

羅晩遇, 羅晩瑞, 羅文喆, 羅晩致,

羅崇大, 羅景祚, 羅時永, 羅東綸,

羅麟集,

 

羅舜衣, 羅舜裳, 羅顯, 羅贇, 羅處光,

羅振文, 羅煥興, 羅慶源, 羅謙, 羅禧, 羅烈, 羅世纘, 羅藎國, 羅漢俊,

羅益文, 羅瑊, 羅漢英, 羅恒, 羅信宗, 羅友正, 羅祉, 羅德元, 羅義臣, 羅選, 羅世經, 羅世儉, 羅德立, 羅世纓,

羅德基, 羅永達, 羅鳳采, 羅纘褧,

羅元錫,

무과안

羅世俊, 羅晊, 羅冕, 羅士惕, 羅德愼,

羅德憲, 羅德昌, 羅允素, 羅繼素,

羅繪素, 羅重素, 羅成素, 羅好仁,

羅礻成, 羅裕(인조조), 羅斗天, 羅愞,

羅斗寅, 羅斗居, 羅以檀, 羅聚奎,

羅晩齊, 羅纘, 羅斗炫, 羅斗南, 羅佾,

羅學海, 羅祥基, 羅璜, 羅東集,

羅裕(고려조), 羅益禧(고려조),

羅殷制, 羅世寶, 羅邃, 羅禧, 羅致用, 羅得龍, 羅永康, 羅大用, 羅迪,

羅大鵬, 羅復昌, 羅世華, 羅斗壁,

※저자는 문과 羅藎國을 나주로 분류 하였으나, 금성인 것을 필자가 확인하였음.

羅偃은 나주목지에 나주로 분류되어 있고, 나주나씨 족보에 등재되었지만, 한국학 연구 원측에서는 금성나씨에도 등재되었다고 필자가 확인하였음.

 

 

 

 

 

 

 

성명

생몰년

합격등급

羅晩榮

경여(慶餘)

 

1652 ~ ?

나주

갑과1등

羅世纘

비승(丕承)

송재(松齋)

1498 ~ ?

나주

갑과1등

羅緯文

성휘(聖輝)

 

1602 ~ ?

나주

갑과2등

羅安世

덕여(德輿)

건계(建溪)

? ~ ?

나주

갑과3등

羅士愃

중묵(仲默)

 

? ~ ?

나주

병과 1등

羅純榮

 

 

1857 ~ ?

나주

병과10등

羅錫熙

 

 

1817 ~ ?

나주

병과11등

羅藎國

성좌(誠佐)

 

1524 ~ ?

나주

병과1등

羅台晟

 

 

1764 ~ ?

나주

병과11등

羅宜素

의지(宜之)

 

1587 ~ ?

나주

병과12등

羅斗永

 

 

1859 ~ ?

나주

병과16등

羅忠佐

양필(良弼)

 

1728 ~ ?

나주

병과16등

羅弘漸

대중(大仲)

 

1707 ~ ?

나주

병과19등

羅 恮

자경(子敬)

 

1526 ~ ?

나주

병과2등

羅學素

 

 

1719 ~ ?

나주

병과21등

羅義臣

충경(忠卿)

 

? ~ ?

나주

병과23등

羅晩成

대로(大老)

 

1646 ~ ?

나주

병과27등

羅茂松

수부(秀夫)

창랑(滄浪)

1577 ~ ?

나주

병과3등

羅 昶

언명(彦明)

지재(止齋)

? ~ ?

나주

병과4등

羅得康

 

 

? ~ ?

나주

병과5등

羅時鏞

 

 

1814 ~ ?

나주

병과5등

羅 恰

존중(存中)

 

1523 ~ ?

나주

병과5등

羅茂春

기지(耆之)

구화(九華)

1580 ~ ?

나주

병과6등

羅 曜

숙랑(叔朗)

 

? ~ ?

나주

병과6등

羅 선

정경(整卿)

 

1634 ~ ?

나주

병과8등

羅緯素

계빈(季彬)

 

1583 ~ ?

나주

병과8등

羅允明

회원(晦元)

 

? ~ ?

나주

병과8등

총27명

 

 

 

 

 

<자료2> 조선조 문과 방목에서 「본 나주」 나씨 현황

출처 : 한국학 중앙연구원

 

 

 

 

 

 

 

 

 

<자료3>조선시대 문과방목 「본 금성」 나씨 합격자 현황

출처: 한국학 중앙연구원

 

나홍순(羅弘淳)/고종2년(1865) 1829 ~ ? 금성(錦城) 식년시 병과(丙科) 29등

나경성(羅經成)/고종29년(1892) 1847 ~ ? 금성(錦城) 별시1 병과(丙科) 3등

 

<자료4> 조선조 무과 방목 「본 나주」 나씨 합격자 현황

 

성명

무과합격정보

이력

거주지

羅甫仁

인조15년(1637)정축 별시 본과 1042위

나주

羅守正

守門將

羅繼賢

효종2년(1651)신묘 별시병과1052위

나주

羅榮男

保人

恩山

羅徽星

영조2년(1726)병오 식년시병과113위

나주

羅平祥

兼司僕

羅 ▣

효종2년(1651)신묘 별시병과1157위

나주

羅綺文

校生

김제

羅斗雄

정조14년(1790)경술 증광시병과118위

나주

羅哲雲

武學

載寧

羅德厚

광해군7년(1615)을묘 식년시병과12위

나주

羅 恒

保人

나주

羅天維

영조2년(1726)병오 식년시병과124위

나주

羅萬起

閑良

羅 성

인조22년(1644)갑신 별시병과132위

나주

羅繪素

保人

나주

羅星官

정조8년(1784)갑진 정시병과1334위

나주

羅業祥

閑良

安岳

羅天章

정조16년(1792)임자 식년시병과136위

나주

羅起邦

別武士

황주

羅景含

순조13년(1813)계유 증광시병과143위

나주

羅命明

將校

甑山

羅而丙

숙종4년(1678)무오 증광시병과145위

나주

羅致雄

校生

成川

羅大吉

인조15년(1637)정축 별시병과1466위

나주

羅 興

兼司僕

龍仁

羅致三

영조1년(1725)을사 정시병과149위

나주

羅斗樞

閑良

江東

羅聚奎

숙종40년(1714)갑오증광시병과16위

나주

羅汝器

閑良

나주

羅台彬

정조8년(1784)갑진 정시병과1712위

나주

羅碩興

閑良

평양

羅文會

정조16년(1792)임자 식년시병과187위

나주

羅致恭

別武士

수원

羅翰東

영조41년(1765)을유 식년시병과191위

나주

羅興載

閑良

함안

羅慶恒

영조43년(1767)정해 알성시병과200위

나주

羅星七

別武士

평양

羅晩道

영조4년(1728)무신 별시병과205위

나주

羅斗節

閑良

나주

羅天用

정조8년(1784)갑진 정시병과2084위

나주

羅七奎

別武士

朔州

羅得天

정조8년(1784)갑진 정시병과2156위

나주

羅興采

閑良

价川

羅正日

정조8년(1784)갑진 정시병과2157위

나주

羅必奎

別武士

价川

羅明得

정조8년(1784)갑진 정시병과2237위

나주

羅星三

閑良

甑山

羅雲豹

순조9년(1809)기사 증광시병과228위

나주

羅德春

騎士

海州

羅極星

영조1년(1725)을사 증광시병과230위

나주

羅銀柱

閑良

安州

羅完福

정조16년(1792)임자 식년시병과233위

나주

羅泰柱

武藝別監

羅萬龜

숙종1년(1775)을묘 증광시병과25위

나주

羅緯星

貢生

나주

羅斗樞

정조8년(1984)갑진 정시병과2564위

나주

羅海周

閑良

高靈

羅弘揆

영조4년(1728)무신 별시병과258위

나주

羅尙渭

副司勇

羅台尙

정조16년(1792)임자 식년시병과26위

나주

羅振西

別武士

平壤

羅三得

정조14년(1790)경술 증광시병과270위

나주

羅震奎

都監軍

羅大用

선조16년(1583)계미 별시병과28위

나주

羅 亢

校生

나주

羅弼聖

숙종36년(1710)경인 증광시병과28위

나주

羅逸立

副司果

羅三采

영조1년(1725)을사정시병과295위

나주

羅順發

別武士

江東

羅斗旻

영조12년(1736)병진정시병과300위

나주

羅海謙

別武

옹진

羅秀一

인조15년(1637)정축별시병과3135위

나주

羅天敬

羽林衛

羅永祿

인조15년(1637)정축별시병과3152위

나주

羅起

判官

안산

羅京元

인조15년(1637)정축별시병과346위

나주

羅緖傑

兼司僕

수원

羅亨祿

순조9년(1809)기사증광시병과346위

나주

羅雲宅

別武士

江界

羅興男

인조15년(1637)정축별시병과3617위

나주

羅漢國

司果

開寧

羅克賢

인조22년(1644)갑신별시병과37위

나주

羅信吉

內禁衛

羅永禮

선조17년(1584)갑신별시병과28위

나주

羅晉孫

保人

해남

羅二生

인조15년(1637)정축별시병과3835위

나주

羅應立

兼司僕

양양

羅舜臣

효종2년(1651)신묘별시병과398위

나주

羅茂仁

司果

羅太云

인조15년(1637)정축별시병과3993위

나주

羅德勳

兼司僕

수원

羅成一

현종10년(1669)기유정시병과40위

나주

羅希仲

副司果

羅悌一

인조15년(1637)정축별시병과4318위

나주

羅逸金

免賤

星山

羅 吉

인조15년(1637)정축별시병과4855위

나주

羅 明

部將

羅雲學

순조29년(1829)기축정시병과495위

나주

羅益菜

馬兵

定川

羅 俊

인조15년(1637)정축별시병과4981위

나주

羅德兄

守門將

安岳

羅從鶴

인조15년(1637)정축별시병과5175위

나주

羅晋賓

兼司僕

羅仲男

인조15년(1637)정축별시병과5250위

나주

羅德輔

守門將

羅斗樞

영조49년(1773)계사증광시병과54위

나주

羅泰奎

別武士

朔州

羅晩齊

숙종33년(1707)정해별시병과59위

나주

羅斗煒

閑良

남평

羅天紀

영조6년(1730)경술정시병과6위

나주

羅善侃

館軍

평양

羅永建

인조15년(1637)정축별시병과615위

나주

羅景佑

兼司僕

나주

羅八紀

효종2년(1651)신묘별시병과624위

나주

羅 瓛

校生

金提

羅斗天

인조22년(1644)갑신정시병과68위

나주

제/두우

校生

나주

羅 迪

선조16년(1583)계미별시병과72위

나주

羅德彦

內禁

나주

羅俊植

철종10년(1859)기미증광시병과72위

나주

羅益遜

閑良

羅弘祥

영조43년(1767)정해알성시병과81위

나주

羅致聖

閑良

成川

羅軍信

인조15년(1637)정축병시병과9위

나주

羅寶化

兼司僕

용인

羅碩鳳

영조26년(1750)경오식년시을과2위

나주

羅武述

騎士

해주

羅廷彦

선조13년(1580)경진별시을과3위

나주

羅 恮

保人

羅正倫

정조16년(1792)임자식년시병과5위

나주

羅國星

別武士

평양

羅國弼

영조3년(1727)정미증광시병과7위

나주

羅武燁

業武

龍川

총68명

 

 

 

 

 

출처: 한국학 중앙연구원

 

 

<자료5> 조선조 무과 방목 본관 기타 성씨 합격자 현황

출처: 한국학 중앙 연구원

성명

무과합격정보

이력

거주지

羅英純

순조29년(1829)기축정시병과 350위

금성

羅應台

護衛軍官

羅文傑

중종8년(1513)계유식년시병과13위

안정

羅連孫

保功將軍

懷德

羅致文

효종2년(1651)신묘별시병과560위

안정

羅善興

閑良

羅得聖

인조14년(1636)병자별시병과60위

안정

羅 佶

司果

陽州

羅尙煥

인조15년(1637)정축별시병과3945위

수성

羅 紘

兼司僕

星山

총5명

 

 

 

 

 

 

 

 

4. 마무리의 글

 

이상과 같이 필자는 고문헌, 방목을 바탕으로 나씨의 本을 고찰하였다.

조선조 하반기에 드디어 본 금성이 출현함을 알 수 있다.

그것은 고려, 조선조 본관제가 본적지(출신지) 개념이 완전 소멸되는 시기인 조선조 하반기 족보 정착 시기와 일치하며 이때부터는 본관은 성관 의미의 본관으로 사용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출처 : 구도의 길
글쓴이 : 나천수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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