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성[수성]나씨

금성나씨와 나주나씨에 대하여

미르뫼 2014. 3. 20. 23:52

 

 

님의 질문에 답변을 합니다.

 

제가 알기로는 금성나씨와 나주나씨는 다른계통으로 알고 있는데 나주나씨에서 금성나씨가 나온 거라고 말하시는분들이 여럿 있더라고요 서로 시조가 다른데 의문입니다

또한 무신흉변은 조선 영조시대에 나온거라 앞뒤가 안맞지 않습니까?? 시조가 고려사람인데??

 

답변 : 나주 나씨의 시조는 중국에서 귀향한 나부(羅富)이시고, 금성 나씨의 시조는 나총례(羅聰禮)이시고 백제에서 고려로 넘어와 입적하였지요. 그리고 본관 연혁을 본다면 금성에서 나주로 되었습니다. 아마도 이 본관이 바뀐 것이 혼돈의 주요 사유가 된 것 같습니다. 그리고 분명히 밝히지 못한 것이라면 자료가 없어 나주 나씨 나부공이 송나라에서 왔는지 아니면 어디에서 왔는지 분명하지 않아 숙제로 남겨져 있습니다. 그러니 아직 섣불리 나서서 말할 단계가 아닌 것이지요. 이에 단정하기는 이른감이 또 남아 있는 문제 중의 하나입니다.

 

한글과 한문을 병행합니다. 이유는 한문에는 깊은 뜻이 담겨있기 때문입니다. 이점을 양해해 주시기 바랍니다. 본관연혁을 읽어보시면 내용을 이해하실 것입니다.

 

아래는 금성 나씨와 나주 나씨에 대한 정확한 정보를 올려 드리겠습니다.

 

 

먼저 질문하신 순서에 따라 금성 나씨에 대한 정보부터 올려드립니다.

 

 

금성 나씨(錦城 羅氏)에 대()하여

 

1. 금성 나씨(錦城 羅氏) 시조(始祖) : 나총례(羅聰禮)

2. 금성 나씨(錦城 羅氏) 유래(由來) :

 

금성 나씨(錦城 羅氏)의 시조(始祖) 나총례(羅聰禮) 금성나씨대동보(錦城羅氏大同譜)에 의하면 고려(高麗) 정종(正宗) 때 삼한벽상일등공신(三韓壁上一等功臣)의 호()를 받고 삼중대광보국숭록대부(三重大匡輔國崇祿大夫)로서 금성부원군(錦城府院君)에 봉()해졌다고 한다. 후손(後孫)들이 그를 시조(始祖)로 금성(錦城)을 본관(本貫)으로 하여 세계(世系)를 이어왔다.

 

()의 휘()는 총례(聰禮)이고 금성 나씨(錦城 羅氏)의 시조(始祖)로 처음 이름은 종례(宗禮)이며 시호(諡號)는 충문(忠文)이다. 관향(貫鄕)은 금성(錦城)이나 후일(後日) 금성(錦城)을 나주(羅州)로 개칭(改稱)함에 따라 나주(羅州)로 부르는 후손(後孫)도 있다.

 

나총례(羅聰禮)는 어려서부터 자품(自品)이 웅위(雄偉)하고 영용다지(英勇多智)하여 학문(學文)과 무용(武勇)이 뛰어났다. 신라(新羅) 말엽(末葉) 금성지방(錦城地方)의 호족(戶族)으로 금성태수(錦城太守)가 되었다.

 

후백제(後百濟)의 왕() 견훤(甄萱)은 백제(百濟)의 의자왕을 잇는다고 하였으나 901년 금성지역(錦城地域) 부락들을 약탈(掠奪)하는 등() 횡포(橫暴)를 부리자, 금성태수 나총례(羅聰禮) ()은 궁예(弓裔)정권(政權)에 내부(內附)하여 보호(保護)를 요청(要請)하여 훗날 태조(太祖) 왕건(王建)의 후삼국(後三國) 통일(統一)에 힘을 합()하였다.

 

태봉(泰封)의 왕() 궁예(弓裔)는 장차에 있을 후백제와의 통일(統一)전쟁(戰爭)을 염두에 두고 배후(背後) 근거지(根據地)를 확보(確保)하기 위해 막료(幕僚)인 왕건장군(王建將軍)을 남방(南方)경락의 선봉(先鋒)으로 내세워 출전(出戰)시켰다.

 

그 무렵 금성태수 나총례(羅聰禮)는 견훤(甄萱)의 횡포(橫暴)에 나라의 장래를 걱정하며 힘겹게 견디던 중이었다. 903년 나총례(羅聰禮)는 같은 해상(海上)세력(勢力)인 왕건장군(王建將軍) 금성 무안 압해 등 서남해안을 공취하여 오자 속현 십여군현과 합하여 성문을 열어 환영하며 적극 협보하였고 왕건장군과 금성을 공취(攻取)한 군사를 나누어 지키게 하여 장차 고려창업(高麗創業)의 기틀을 마련하는 초석이 되었으며 후일 금성을 나주라 개칭(改稱)하였다.

 

918(九一八年) 왕건(王建)이 홍유 배현경 신숭겸 복지겸 등의 추대로 왕위에 올라 고려(高麗)를 세웠다. 이어 전개된 후삼국(後三國) 통일(統一) 과정(課程)에서 공()을 세운 나총례(羅聰禮)에게 삼한벽상공신(三韓壁上功臣)을 책봉(冊封)하고 공신당(功臣堂) 벽에 다른 삼한공신(三韓功臣)들과 함께 나총례(羅聰禮)의 모습을 그려 넣고 대광(大匡)을 제수 하였다 대 혜종 원년(九四三)에는 북방방어(北方防禦)와 이듬해 왕규(王規)의 난()을 평정(評定)하는데 공()을 세웠다. 정종 (九四七)에는 박수경과 더불어 내란을 평정(評定)하는데 또다시 큰 공()을 세웠다.

 

고려성군 문종 (五四)에 삼한공신(三韓功臣) 백명에게 차제직(次第職)을 추증할 때 나총례(羅聰禮)는 삼한벽상대광일등공신(三韓大匡壁上一等功臣)에 더하여 금성부원군(錦城府院君)을 추봉(追封)하고 충문(忠文)이란 시호(諡號)를 내렸다.

 

고려(高麗史) 열전편에대장군 나유(羅裕)는 나주인(羅州人)인데 삼한벽상대광일등공신(三韓大匡壁上一等功臣) 나총례(羅聰禮) 10세손(世孫)이다.”라 하였고 이제현(李齊賢)이 지은 금성군 나익희(羅益禧) 묘지문(墓地門)에도 나총례(羅聰禮)를 삼한대광일등공신(三韓大匡壁上一等功臣) 으로 기록(記錄)하고 있다.

 

후손(後孫)들은 성향(姓鄕)인 나주시(羅州市) 문평 무학산록(無鶴山麓)의 용트림하는 혈처에 단()을 모셔 참배(參拜)하는 곳으로 삼고 경모사(景慕祠)에 위패를 후손 九十()와 함께 봉안(奉安)하여 일년(一年)에 한차례 씩 숭선보본(崇先報本)의 추모행사를 거행하고 있다.

 

나총례(羅聰禮)의 역사적(歷史的) 공적(功績)과 삼한통일(三韓一統)정신을 기리기 위해 ○○ 월에 경기도(京畿道) 파주시 고려통일대전(高麗統一大殿)에 배향하니 그 공훈(功勳)은 천추에 불멸(不滅)할 것이요. 충령(忠靈)을 보우하는 향불은 만년(萬年)에 이어지리로다.

 

 

3. 금성 나씨(錦城 羅氏) 본관(本貫) 연혁(沿革)

 

금성(錦城)은 전라남도(全羅南道) 나주시(羅州市)의 옛 이름으로 백제(百濟) 때 발라군(發羅郡)으로 불렸고, 뒤에 죽군성(竹軍城)으로 바뀌었다. 백제(百濟) 멸망(滅亡) () ()나라가 이곳에 대방주(帶方州)를 설치(設置)하였으며, 686(신라(新羅) 신문왕(神文王) 6)에는 통의군(通義郡)으로, 757(경덕왕 16) 이후(以後)로는 금산군(錦山郡) 또는 금성군(錦城郡)으로 부르며 무주(武州 : 光州)의 관할(管轄)로 두었고, 회진현(會津縣여황현(艅艎縣철야현(鐵冶縣) ()이 부속(部屬)으로 영입(迎入)되었다. 940(고려 태조 23)에 나주(羅州)로 지명(地名)이 바뀌었고, 983(성종 2)에 나주목(羅州牧)이 설치(設置)되었다. 995(성종 14)에는 나주진해군절도사(羅州鎭海軍節度使)가 되었다. 1018(현종 9) 다시 나주목(羅州牧)으로 고쳐 5개의 속군(屬郡)(무안·담양·곡성·낙안·남평) 11개의 속현(屬縣)(철야·반남·안노·복룡·원율·여황·창평·장산·회진·진원·화순)을 거느렸다. 1310(충선왕 2)에 지주사(知州事)로 강등(降等)되었다가 1356(공민왕 5)에 다시 목()으로 승격(昇格)하였다. 고려(高麗조선시대(朝鮮時代)를 통()하여 주로 목(), ()로서 전남(全南)지역(地域) 행정(行政)의 중심지(中心地)를 이루었다. 1895(고종 32) 지방제도(地方制度) 개정(改定)으로 나주부(羅州府)로서 나주군(羅州郡) ()을 관할(管轄)하였고, 1981년 나주읍(羅州邑)과 영산포읍이 통합(統合)하여 금성시(錦城市)로 승격(昇格)하여 나주군(羅州郡)에서 분리(分離)되었고, 금성시(錦城市) 1985년 나주시(羅州市)로 개칭(改稱)되었다. 1995년 나주시(羅州市)와 나주군(羅州郡)이 통합(統合)되어 나주시(羅州市)로 개편(改編)되었다.

  

 

4. 금성 나씨(錦城 羅氏) 계파(系派) 및 분파(分派)

 

충절공익희파(忠節公益禧派)

참봉공수파(參奉公秀派)

부사공항파(府事公亢派)

판결사공참파(判決事公參派)

이문파(以文派)

득춘파(得春派)

교위공희파(校尉公禧派)

참판공침파(參判公沈派)

진사공지파(進士公祉派)

훈도공복파(訓導公福派)

부장공파(副將公派)

첨지공율파(僉知公慄派)

유파(유파)

진파(袗派)

금파(衿派)

진사공항파(進士公恒派)

현감공상파(縣監公)

참의공협파(參議公協派)

부호군공언파(副護軍公彦派)

석파(碩派)

참봉공열파(參奉公悅派)

우파(祐派)

침파(침파)

수남파(秀南派)

진사공한준파(進士公漢俊派)

붕파(鵬派)

참봉공임파(참봉공임파)

신파(愼派)

생원공수경파(生員公守經派)

처경파(處經派)

생원공문경파(生員公問經派)

철파(徹派)

봉익파(鳳翼派)

한림공파(翰林公派)

경복파(景福派)

효헌파(孝憲派)

효방파(孝邦派)

후계파(後繼派)

상경파(상격파)

응경파(응경파)

신경파(신경파)

영도첨의공순파(領都僉議公珣派)

참봉공덕인파(參奉公德仁派)

부사공덕의파(府事公德義派)

전서공파(典書公派)

시랑공파(侍郞公派)

금양군파(錦陽君派)

연안군파(延安君派)

직장공파(直長公派)

염공파

죽헌파

체암파

계은공파

성백리공파

송재공파

총례공파

창주공파

청백리공파(淸白吏公派)

나주파, 강진파, 연천파, 무안파, 영암파, 원주파, 교동파, 광주파, 한산파, 화순파. 광주파, 해제파, 용강파, 성천파 등이 있다.

 

 

5. 금성 나씨(錦城 羅氏) 대표적(代表的) 인물(人物)

 

금성나씨(錦城羅氏)의 대표적(代表的)인 인물(人物)로는 시조(始祖) 10세손(世孫) 나 유(羅 裕)가 있다. 그는 지밀직사사(知密直司事) 득황(得璜)의 아들로, 원종 때 김방경(金方慶)과 함께 삼별초를 진압(鎭壓)했다. 그 후 충렬왕(忠烈王) 때 합단(哈丹)이 동북 변경을 침범하였을 때 여러 차례 공을 세워 지밀직사사에 승진(昇進)하고, 정조사(正朝使)로 원()나라에 가서 회원대장군(懷遠大將軍)의 호를 받았다.

 

그의 아들 양절공(良節公) 나익희(羅益禧)는 충선왕(忠宣王) 말기(末期)에 신호위 호군(神虎衛護軍)이 되었으나 충선왕(忠宣王)의 신법(新法) 제정에 반대하다가 면직되었다. 10년 뒤에 상의평리(商議評理)에 오르고 금성군(錦城君)에 봉()해졌으며, 충목왕(忠穆王)이 즉위(卽位)하자 첨의창리(僉議參理)가 되었다. 말년(末年)에 거평(居平 : 지금의 나주시 문평면)으로 돌아와 정착함으로 해서 그 후손(後孫)이 문평(文平)과 영광(靈光)에서 거평파(居平派)를 이루게 되었다. 그의 아들 나영걸(羅英傑)은 공민왕 때 팜밀직사사(判密直司事)를 지냈고 , 영걸이 아들 나문규(羅文奎)는 서해도 안렴사(西海道按廉使)를 지냈다.

 

죽헌(竹軒) 나계종(羅繼從)은 직() 의 아들로 공민왕(恭愍王) 때 문과에 급제, 춘추관 겸열(春秋館檢閱수찬(修撰) 등을 지내고, 공양왕 때 예문관 제학(藝文館提學)에 올랐으나 정몽주(鄭夢周)가 살해되고 고려의 국운이 기울어지자 나주로 돌아와서 은거, 나주파(羅州派)의 연원을 이루었다.

 

조선조에 들어와서는 뚜렷한 인물을 내지 못하다가 희민공(僖敏公) 나세찬(羅世纘)이 호당(湖堂) 출신으로 문과 중시(重試)에 장원 급제하여 봉고(奉敎)가 되었다. 그러나 중시에 응할 때 대책문(對策文)에서 김안로(金安老)의 전횡(專橫)을 통박한 것이 화근이 되어 고성(固城)에 안치당했다. 그 후 김안로가 사사되자 복직되어 다시 발영시(拔英試)에 장원, 한성부 우윤(漢城府右尹·전주 부윤(全州府尹) 등을 지냈다. 구화(九華) 나무춘(羅茂春)은 광해군 때 문과에 급제, 학정(學正)에 올랐으나 폐모론이 일어나자 엄성(嚴惺)과 함께 유생들을 이끌고 반대하는 상소를 하다가 파직되었다.

 

 6. 금성 나씨(錦城 羅氏) 대동(大同) 항렬표(行列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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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조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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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정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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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성파[壽城派]

 

7. 금성 나씨(錦城 羅氏) 주요(主要) 세거지(世居地)

 

- 전라남도 나주시 문평면 오룡리

- 전라남도 나주시 문평면 동원리

- 전라남도 나주시 문평면 대도리

- 황해도 금천군 동화면 매남리

- 황해도 금천군 동화면 매서리

- 황해도 웅진군 용천면 용천리

 

 

8. 금성 나씨(錦城羅氏) 인구수(人口數)

 

2000년 통계청이 발표한 결과에 의하면 금성나씨는 12,869가구 총 40,493명이 있는 것으로 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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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주 나씨(羅州 羅氏)에 대()하여

 

1. 나주 나씨(羅州 羅氏) 시조(始祖) : 나부(羅富)

2. 나주 나씨(羅州 羅氏) 유래(由來) :

 

나주 나씨(羅州 羅氏)의 시조(始祖) 나부(羅富)는 중국(中國) 예장 출신(出身)으로 송()의 개국(開國) 공신(功臣) 나언담의 후손(後孫)이자 이부상서를 지낸 나귀(羅貴)의 형이다. 봉명사신으로 고려(高麗)에 왔다가 송()나라가 멸망(滅亡)하자 귀화(歸化)하여 나주(羅州)에 정착(定着)하였다. 고려(高麗)에 귀화(歸化)한 이후(以後) 상장군(上將軍)을 지냈다. 조선씨족통보에 의하면 나부(羅富)의 선조(先祖) 광정공이 주()나라 때 나국후(羅國侯)에 봉()해지면서 성씨(姓氏)를 나씨(羅氏)로 바꾸었다고 한다. 문헌(文獻)에는 55개의 나씨(羅氏)가 전()하나, 금성 나씨(錦城 羅氏) 를 제외(制外)한 나머지는 모두 나주 나씨(羅州 羅氏)에서 파생(派生)된 것이다.

 

 

3. 나주 나씨(羅州 羅氏) (淵源)

 

나주 나씨(羅州 羅氏)의 시조(始祖)고려중엽(高麗中葉)에 중국(中國)의 예장(豫章)에서 동도(東渡)하신 부공(富公)이다.

 

중국(中國)에서 성씨(姓氏)는 황제(黃帝)와 염제(炎帝)에서 출발(出發)하는데, 나씨(羅氏)는 황제(黃帝) 계열이다. 황제(黃帝)의 후손(後孫) 광정공(匡正公)이 주()나라에서 공()을 세워 나국후(羅國侯)에 봉()해졌고, 나국이 학공대인 24 537년만에 초나라에 멸망하자 학공의 손자인 능보공이 진나라의 협력을 받아 羅國을 되찾고 성을 운씨에서 국명(國名)을 따라 나씨(羅氏)로 개성(改姓)하였다. 따라서 능보공이 나씨의 시조가 된다.

 

능보공의 후손(後孫) 주공(珠公)이 한()나라 초()에 남창성을 쌓고 성내에 예장나무를 심었는데, 이로 인해 남창성 일대에 예장군(豫章郡)이 설치(設置)되었다. 이에 주공은 예장파(豫章派)의 시조(始祖)가 된다.

 

시조(始祖)이신 부공(富公)은 중국(中國) ()의 예장(豫章)사람으로 나라가 위급(危急)해 지자 봉명사신(奉命使臣)으로 고려(高麗)에 왔다가 송이 멸망(滅亡)함에 본국(本國)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고려(高麗)에 귀화(歸化)하였다고 하며, 전라도(全羅道)의 여황()이란 곳에 정착(定着)하였는데, 어질고(累仁) ()을 많이 베풀었으므로 호남(湖南)의 망족(望族)이 되었다고 전해지고 있다.

 

부공(富公)고려(高麗朝)에서 감문위상장군(監門衛上將軍)이란 무관직(武官職)을 받으셨다. 감문위(監門衛)는 중앙군(中央軍)의 일부로서 궁성(宮城)의 수비(守備)를 담당(擔當)하는 부서이고 상장군(上將軍)은 그 부서(部署)의 책임자로서 품계는 정삼품(正三品)으로 정의대부(正議大夫)이다.

 

시조(始祖) 부공(富公)은 중국(中國)에서의 행적(行跡)은 자료부족(資料不足)으로 밝혀지지 않고 있으나 송 멸망(滅亡)시의 봉명사신이었다는 설에 따라 북송말과 남송말의 인물을 고려할 수 있고, 금나라 말의 인물(人物)고려(考慮)할 수 있다. 북송 말(1127)의 인물이라면 후5세인 世公의 출생(出生)(1320년 출생)고려(考慮)하면 시조부터 후 4세 수영공까지 170여년동안 8~9대까지 독자(獨自)로 내려올 수 있는가? 하는 의문(疑問)이 있고, 남송 말(1279)의 인물이라면 세공의 출생(出生)고려(考慮)하면 42년 동안에 후1세에서 후 5세인 세공까지 출생(出生)이 가능(可能)한가? 하는 의문(疑問)이 생긴다. 그리고 금나라 말(1234)의 인물(人物)이라면 어느 정도(程度) 가능성(可能性)은 있으나 금과 고려(高麗)와의 관계(關係)를 볼 때 귀화(歸化)인에게 감문위 상장군이란 직위를 주었으까? 하는 의문(疑問)이 생긴다. 이 부분(部分)은 추가(追加)로 자료(資料)를 수집(收集)하는 등()의 연구(硏究)가 필요(必要)하다.

 

북송(北宋) ()의 인물(人物) 羅富란 이름을 갖고 있던 인물(人物)이 있어 참고(參考)로 소개(紹介)키로 한다. 남창일대(南昌一帶)에 세거(世居)하는 나씨들의 파보인 백림파보(栢林派譜)와 예장나씨대성보(豫章羅氏大成譜)에 나오는 나부(羅富)는 족보명은 인노(仁老)라 하며 자()가 부()이다. 그는 1063년에 출생하였으며, 萍鄕縣(강서성 소재)의 현령(縣令)을 지냈다. 그는 대관(大觀) 2(서기 1108)에 훈관인 무기위(武騎尉)가 되었고, 문관인 봉의랑(奉義郞)을 거쳐 훈관인 운기위(雲騎尉)로 승급(昇級)되었다. 나부(羅富)는 북송(北宋) 滅亡時(滅亡時)(1127) 65세로 부인(夫人)의 장지(葬地)는 족보상(族譜上)에 기록(記錄)되었으나 본인(本人)의 장지(葬地)에 관해서는 기록(記錄)이 없다는 점() () 東渡說(東渡說)을 뒷받침하고 있다.(*훈관은 무공이 있는 자에게 주는 명예직임)

 

나주 나씨(羅州 羅氏)의 관향(貫鄕)이 나주로 정해진 것은 조선초기(朝鮮初期)로 보여진다. 이는 조선조(朝鮮朝) ()에 여황현이 폐현(廢縣)되고 나주(羅州)에 합병(合倂)되었기 때문이다.

 

나주 나씨(羅州 羅氏)는 부공을 시조(始祖)로 하고 득규공()을 후1(1)로 하여 세계(世界)를 이어오고 있다. 1세 득규(), 2세 중윤(仲潤), 3세 송기(松奇), 4세 수영(守永)까지는 독자(獨子)로 내려오다가 수영(守永)이 위,,,,(,,,,) 5형제를 두었는데, 이분들은 모두 고려(高麗末)에 관직(官職)에 나갔으며 각각 5대파조(五大派祖)가 되었다.

 

나주 나씨(羅州 羅氏)는 이들 다섯분의 후예(後裔)들로서 자손이 전국(全國) 각지(各地)에 번창(繁昌)하고 학행덕업(學行德業)이 근 1000년 동안 끊이지 아니하여 많은 인재(人才)들이 문·무과(·武科)에 등과(登科)하였고, ··(··)과 애국지사(愛國志士)들이 배출(輩出)되었으며, 오늘날에도 부총리(副總理), 장관(長官), 대법관(大法官), 외교관(外交官), 대학총장(大學總長), 국회의원(國會議員)등 많은 활동가(活動家)들이 속출(續出)하여 국가(國家) 및 사회발전(社會發展)에 공헌(貢獻)하고 있고, 그 자손들이 10만여명에 이르고 있다.

 

 

4. 나주 나씨(羅州 羅氏) 본관(本貫) 연혁(沿革)

 

나주 나씨(羅州 羅氏)의 본관(本貫)은 나주(羅州). 나주(羅州)는 본래(本來) 백제(百濟)의 발라현(發羅縣)인데 신라(新羅)가 백제(百濟)를 멸망(滅亡)한지 27년만인 신문왕(神文王) 5년에 발라현을 금산군이라 개칭(改稱)하고 성을 錦城이라 하였다. 그 후 견훤(甄萱)이 후백제를 세우고 이곳을 차지하였으나 후() 고구려(高句麗)의 궁예(弓裔)가 왕건(王建)을 시켜 해로로 금성을 공략(攻略)하여 빼았고 나주(羅州)로 고쳤으며, 고려(高麗朝)에서도 그대로 나주(羅州)로 불렀다.

 

고려 성종 14년에 나주(羅州)에 절도사를 두었고 진해군(鎭海軍)이라 칭()하여 해양도(海陽道)에 예속시켰다. 해양도는 나주, 광주, 정주. 승주. 구주. 담주. 낭주 등의 주현이다. 현종이 원년(元年)에 나주(羅州)로 걸안(契丹)의 난()을 피하였다가 귀환한바 있어 9년에는 목()으로 승격(昇格)시켰다.

 

조선조(朝鮮朝)에서는 세조(世祖)때 나주에 진()을 두었고, 仁祖시와 英祖시 한때 錦城縣으로 降等하였다가 다시 羅州 復原하는 등 羅州 錦城이란 이름을 번갈아 쓰기도 하였다. 1894년에는 나주부(羅州府)가 되어 관찰사(觀察使)가 주재하였고, 1895년 행정구역(行政區域)이 바뀜에 따라 羅州郡으로 全羅南道에 속하게 되었다.

 

나부의 후손(後孫)들이 나부가 동도하였다는 여황현()(광산군 본랑면)에 세거(世居)하였다. 나주나씨(羅州羅氏)의 본관(本貫)이 나주(羅州)로 정해진 것은 조선조 초기로 보여진다. 이는 조선조(朝鮮朝) 초기에 여황현이 폐현되어 나주(羅州)에 합병(合倂)되었을 뿐만 아니라 조선조(朝鮮朝) 초기(初期)인 세종(世宗) 원년(元年)에 급제(及第)한 나득강[羅得康, 나중우(羅仲佑) 3]이 과방록(科榜錄)에 나주인(羅州人)이라고 明記하므로서 나주나씨(羅州羅氏) 급제자중(及第者中)에는 최초(最初)로 고향(故鄕)(貫鄕)을 나주(羅州)로 밝혔기 때문이다.[恭愍王 초년에 급제(及第)한 나세(羅世)는 선조(先祖)가 중국(中國)에서 왔으며 당시(當時) 중국(中國) 나라였으므로 元人이라 하였고, 恭愍王 11년에 급제한 羅仲佑(羅仲佑)[羅碩(羅碩)의 장자(長子)이며 나득강(羅得康)의 부친(父親))는 과방록에 관향(貫鄕)을 명시(明示)하지 않았다.

 

 

5. 나주 나씨(羅州 羅氏) 계파(系派)() 가문(家門)의 번영(繁榮)

 

나주 나씨(羅州 羅氏)는 시조(始祖) 부공(富公)을 시조(始祖)로 하고, 1 ?부터 후4세 수영공(守永公)까지는 獨子로 내려오다가 수영공이 5()를 두었고, 5명이 모두 관계(關係)에 나갔으므로 이들을 중시조(中始祖)로 하여 전서공파(典書公派), 시랑공파(侍郞公派), 금양군파(錦陽君派), 연안군파(延安君派), 직장공파(直長公派) 5대파(大派)로 최초로 分派되었으며, 각파(各派)는 다시 수개에서 수십개의 지파(支派)로 분파(分派)되었다. 5대파(大派)의 파명은 파조(派祖)의 관직(官職)이나 나라에서 내린 봉직(奉職)과 련관(聯關)이 깊다.

 

첫째인 위()는 호조전서(戶曹典書)를 제수 받았으므로 전서공파(典書公派)의 파조(派祖)가 되었으며, 그의 후손(後孫)들은 평안도(平安道) 용강(龍剛)과 성천(成川) 일대(一帶)에 살아서 전서공파(典書公派)라 하고.

 

둘째인 계()는 중서시랑(中書侍郞)을 지냈으므로 시랑공파(侍郞公派)의 파조(派祖)가 되었으며, 그의 후손(後孫)들은 경기도(京畿道) 강화(江華)일대(一帶)에 살고 있어 시랑공파(侍郞公派)라 하며.

 

셋째인 석()은 사온서직장(?署直長) 영동정(令同正)을 지냈으며 금양군(錦陽君)에 봉()해젔으므로 금양군파(錦陽君派)의 파조(派祖)가 되었으며, 그의 후손(後孫)들은 전라도(全羅道) 김제(金提) 일대(一對)에 살고 있어 금양군파(錦陽君派)라 하고.

 

넷째인 세()는 연안군(延安君)에 봉()해젔으므로 연안군파(延安君派)의 파조(派祖)가 되었다. 그는 우왕(禑王) 6(1380)에 해도원수(海道元帥)로서 금강하구(錦江河口)의 진포(鎭浦)에서 전함(戰艦) 100척으로 서해안(西海岸)으로 침입(侵入)하던 왜구(倭寇)의 배 500척을 최무선(崔茂宣)이 발명(發明)한 화약(火藥)을 이용, 공격(攻擊)하여 완파(完破)하는 청사(靑史)에 빛나는 무공(武功)을 세웠으며, 그 후 문하평리(門下評理)가 되었다 그의 후손(後孫)들은 충청도(忠淸道)의 서천(舒川) 일대(一帶)에 살고 있어 연안군파(延安君派)라 하며.

 

다섯째인 원()은 사온서직장(?署直長) 동정(同正)을 지냈으므로 직장공파(直長公派)의 파조(派祖)가 되었으며, 그의 후손(後孫)들은 전라도(全羅道)의 나주(羅州) 일대(一帶)에 살고 있어 직장공파(直長公派)라 한다.

 

나주 나씨(羅州 羅氏)는 조선시대(朝鮮時代)에 문과(文科) 급제자(及第者) 146명을 비롯하여 명신 7, 열녀 4, 효자 5, 정려를 받은 자 8명 등을 낸 명문이었다.

 

  6. 나주 나씨(羅州 羅氏) 대동(大同) 항렬표(行列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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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나주 나씨(羅州 羅氏) 주요(主要) 세거지(世居地)

 

- 충청남도 서천군 마서면 남전리

 

8. 나주 나씨(羅州 羅氏) 인구수(人口數)

 

2000년 통계청이 발표한 결과에 의하면 나주나씨는 33,600가구 총 108,139명이 있는 것으로 되어 있다.

 

 

끝으로 님의 건강과 행복이 충만 하시기를 빌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