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성[수성]나씨

[스크랩] 고령성씨편람2

미르뫼 2017. 12. 10. 08:02

라. 본관지 연혁(本貫地 沿革)

1) 금성(錦城)

금성은 나주의 고호이다(금성산 이름은 지금의 나주진). 나주는 본래 백제 발라군으로 일운 통의라 하며 신라 때 금산군, 금산은 일운 금성인데 고려태조 때 나주로 고치다. 조선 성종 조에 여황 등 8현, 종남 등 2현, 거평 등 7부곡을 합쳐서 하나로 ?주라 부르니 지금의 나주부이다. 나주 9성 중 그 하나이다.⟪여지승람⟫錦城羅州古號(錦城山名今羅州鎭)羅州本百濟發羅郡一云通義新羅改爲錦山郡一云錦城高麗太朝改爲羅州成宗合艅艎等八縣終南等二縣 居平等七部曲爲一而?州號今羅州府. 羅州九性中其一也. 載⟪輿地勝覽⟫

2) 수성(壽城)

대구광역시의 가운데 동편에 위치한 곳으로 경상북도 경산시와 경계를 이룬다. 신라시대 위화군(渭火郡, 또는 上村昌郡)에 해당한다. 경덕왕이 수창군(壽昌郡)으로 개칭했다. 고려 초에 수성군(壽城郡)이 되었다가 1018년(고려 현종 9) 수성군사(壽城郡司)로 개칭되어 경주에 속하였다. 1390년(고려 공양왕 2년) 해안현(解顔縣)을 겸하여 감무(監務)를 두었다. 1394년(태조 3) 대구겸관으로 두었다가 1414년(태종14) 대구에 편입시켰다. 수성구 지명은 신라시대 수창군을 고려 초 수성군으로 개칭한데서 유래한다.

대구지방법원·대구지방경찰청·대구지방환경청·국립대구박물관 등 각종 관공서를 비롯해 주요 언론매체, 중심 문화시설 등이 자리 잡고 있다.

*周官六翼云壽城古有三城壽火郡一云壤城其姓賓句具城其姓羅仍助伊城其姓曺嵇.據⟪達城誌⟫

*東距慶山界十八里南距淸道界三十九里西南距玄風界四十里西距星州界四十里북距漆谷界二十二里距京六百八十里. 據⟪達城誌⟫

 

2. 高靈入鄕

가. 입향조(入鄕祖)

1) 선향지(先鄕地)

수성군사 나위(羅緯)공의 손자이신 만(蔓)공께서는 김천 장바우(장암동)아며, 그 손자 상지공은 선남면 오도방(문방리, 오도리)이다.

2) 입향지(入鄕地)

“公居星州東茶山坊池洞一名智洞”

공(順孫)께서 성주 다산방 지동(池洞)에 입향하셨으며, 지동을 일명 지동(智洞)이라 하였다. 을사보서(乙巳譜序)에 그 연유를 순손공의 증손(曾孫)인 경문공(景文公)이 한편의 시로 노래했다. 그 시에 다음과 같은 부연 설명이 있다. “어찌 어진 곳을 가려서 취하지 못한다면 의(義)라는 지(智)를 얻을 수 있으리오(取擇不處仁焉得智之義).”

지동으로 입향(入鄕) 한 순송공께서 농사짓기에 편리하도록 잿길을 내셨고 가뭄을 막기 위하여 못을 만드셨다. 길손들이 그 잿길을 하동현(河東峴, 一名 河東路)이라 일컬었고 몽리민들이 그 못을 하동못이라고 일컬었다.

하동로는 임하선생이 강 건너 달성군 다사읍 문산리에 있는 영벽정(映碧亭)을 제목으로 읊은에 실려 있다. 그만큼 많은 길손들이 이용했다는 것이리라. 역시 경산지(京山志)도 기록으로 전하고 있다.

집 앞에 배나무를 심고 집 뒤에는 대나무를 심었다. 공이 이렇게 한 것은 자신의 충절을 이들 나무에 부쳐서 그 징험을 보고자 함 이었다고 전한다. 그 배나무 다섯 그루 중 세 그루가 육백년 풍상의 흔적을 간직한 고목으로 고즈넉이 서서 열매를 맺고 있다.

3) 입향조(入鄕祖)

수성1세

 

2세

 

3세

 

4세

 

5세

 

6세

 

 

 

광우

 

 

유겸

 

상지

 

순손

 

 

 

光佑

 

 

有謙

 

尙之

 

順孫

 

 

 

 

 

 

 

 

김천 지례

 

성주 막동

 

성주 선남

 

다산 지동

 

 

 

휘(諱) 문규가 서해도 안렴사를 지냈다. 자(子) 휘(諱) 위가 공민왕조에 예부시랑을 지냈는데 뒤에 가서 수성군으로 봉해졌다. 수성군이 공의 5대조이다. 고조 휘(諱)는 광우인데 충주목사를 지냈다. 증조 휘(諱)는 만인데 서운관도정을 지냈다. 조 휘(諱)는 유겸인데 순흥부사를 지냈다. 선고(先考) 휘(諱)는 상지인데 사헌부 감찰과 용궁현감(龍宮縣監)을 지냈다. 선비(先妣)는 하빈이씨인데 판서 예(芮)의 여이다. 공은 조선 문종조에 음사(蔭仕)로 하동부사가 되어 좋은 치적을 남기셨다. 수양대군이 단종을 폐위 시키고 스스로 왕위에 오른 것을 보고 불사이군(不事二君)의 충절(忠節)을 가슴에 새기고서 은거지를 찾다가 공의 마음에 들었던 곳이 바로 이곳 지동(池洞)이었다. 공이 이곳에 집을 일으켜 “취원정(聚遠亭)”이라하고 예악시서(禮樂詩書)를 벗으로 삼고 한가로이 보내셨다.

배(配)는 숙인 성주배씨(星州裴氏)인데 좌사간(左司諫) 한(閑)의 여이다. 4남 2녀를 두었다.

아들의 차례는 수경(守經), 처경(處,經), 권경(權經), 문경(文經)인데, 수경은 성균관(成均館) 생원(生員)이 되었고, 처경은 밀양부사(密陽府使)를 지냈고, 권경은 소윤(少尹)을 지냈고, 문경은 생원(生員)이 되었다. 장녀는 종실(宗室) 덕성군(德城郡) ‘민’의 아내가 되었다.

수경이 2남 1녀를 두었는데 이동(異童), 서동(瑞童)이다. 이동은 한성판윤(漢城判尹)을 지냈고, 서동은 밀양도호부사(密陽都護府使)를 지냈다. 여(女)는 별재(別才) 곽거(郭琚)의 아내가 되었다. 처경이 1남1녀를 두었는데 석동이다. 석동은 성균생원(成均生員)이 되었고, 여(女)는 생원 허적(許積)의 아내가 되었다. 문경이 1남을 두었는데 윤행이며, 윤행은 부호군(副護軍)이 되었다. 이동이 1남을 두었는데 경문(景文)이다. 경문이 중종 조에 영릉참봉(英陵參奉)을 제수 받았으나 상언(上言)하고 나아가지 아니했다. 지동(智洞) 남쪽 언덕에 휴휴당(休休堂)을 짓고 지평(持坪) 원정 여희림(園亭 呂希臨)과 도의교문(道義交文)하시었다. 서동이 1남을 두었는데 윤문이다. 윤문이 만호(萬戶)가 되었다. 석동이 1남을 두었는데 옥문이다. 옥문이 별재(別才)가 되었다.

윤행이 1남을 두었는데 귀필(貴弼)이다. 귀필이 현감(縣監)을 지냈다.

취원정(聚遠亭)

하동지(河東池)

 

나. 분파명(分派名)과 세거지(世居地)

수성6세(금성19)

 

 

수성7세(금성20)

 

 

수성8세(금성21)

 

수성9세(금성22)

 

 

수성10세(금성23)

순손 順孫

 

 

수경 守經

 

 

이동 異童

 

경문 景文

 

 

응규 應奎

부장공파

 

 

 

 

 

 

 

다산 지동

 

 

 

 

 

 

 

 

 

 

응기 應箕

참봉공파

통훈대부

 

 

 

 

 

 

 

 

 

(通訓大夫)

 

 

 

 

 

 

 

 

 

 

응두 應斗

기암공파

 

 

 

 

 

 

 

 

 

 

 

 

 

 

 

 

 

 

 

 

 

 

응벽 應碧

생원공파

 

 

 

 

 

 

 

 

 

 

 

 

 

 

 

 

 

서동 瑞童

 

윤문 潤文

 

 

응삼 應參

만호공파

 

 

 

 

 

 

 

 

 

 

 

 

 

 

 

 

 

 

 

 

응서 應瑞

첨추공파

 

 

 

 

 

 

 

 

 

 

 

 

 

 

처경 處經

 

 

석동 碩童

 

옥문 玉文

 

 

응연 應連

밀양공파

 

 

 

 

 

 

 

 

 

 

 

권경 權經

 

 

 

 

 

 

 

 

 

 

 

 

 

 

 

 

 

 

 

 

 

 

 

 

문경 文經

 

 

윤행 允行

 

귀필 貴弼

 

 

승종 承宗

봉사공파

 

 

 

 

 

 

 

 

 

 

 

 

 

 

 

 

 

 

 

 

 

1) 부장공파(部將公派): 고령 다산(못골), 김천 개령

2) 참봉공파(參奉公派): 고령 다산(고방), 성주, 양산, 포항

3) 기암공파(奇菴公派): 고령 다산(논실,아시터,장척), 영주, 군위

4) 생원공파(生員公派): 경남 고성

5) 만호공파(萬戶公派): 합천 덕곡(율원)

6) 첨추공파(添樞公派): 고령 성산(득성,상용)

7) 밀양공파(密陽公派): 대구 달성(옥포)

8) 봉사공파(奉事公派): 충북 영동, 김천 개령

 

 

출처 : 수성나씨종친회(대종회)
글쓴이 : 宗根(畸菴公24世)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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