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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척주동해비 해석

미르뫼 2017. 2. 5. 10:53

                      
                  육향산정의 척주동해비각
   취렴산방翠蘞山房 2011
                                                                     
 
 

 

 

                                

                                                                                               척주동해비 전면 
               
                                                                                                  

 척주동해비문陟州東海碑文 삼척부사 미수허목眉叟許穆이 지은 것으로 비의 규모는 높이 170cm, 너비 76cm, 두께 23cm이다. 1662년 현종 3년에 건립한 척주동해비는 일명 퇴조비退潮碑라 불리듯이 조류潮流의 피해를 막기 위해 건립되었으며, 당초에는 만리도에 건립되었다. 이후 1708년 숙종 34년에 풍랑으로 비석이 부러져 바다에 잠겼던 것을 동왕 35년 부사 홍만기가 글文을 본떠서 다시 새겼으며, 동왕 36년 삼척 부사 박내정이 죽관도 동쪽에 다시 건립하였다가 1969년 12월 6일 현재의 위치인 육향산 산정에 이건하였다. 현재 강원도 유형문화재 제38호로 지정되어 있으며, 비각의 전면에 [척주동해 비각] 제액과 후면에 [동해비각] 제액이 게판되어 있다.

  

                                                                               척주동해비문陟州東海碑  

 

 

 

크기가 높이 175cm, 넓이 76cm, 두께 23cm으로 비교적 큰 비석이다.

이 비석이 세워진 내력은 이러하다.

17세기 중엽에서 18세기 초엽까지 한·수해(旱·水害)와 기아, 질병이 해를 건너뛰지 않을 만큼 잦았다.

더군다나, 당쟁이 가장 극에 달했던 현종·숙종의 집권기는 더욱 심했다고 사록에도 남아 있다. 그 무렵 허목(許穆)이 소위 인조 계비 조대비(趙大妃)의 ‘예송(禮訟) 논쟁’ 에 연유되어 서인 송시열과의 당쟁에서 밀려 삼척부사로 좌천되어 왔다. 1660년의 일이다. 동해에도 예외는 아니어서 해일의 피해가 극심하였다.

특히 삼척은 지형상 오십천과 동해가 맞닿아 있기 때문에 조수(潮水)가 삼척읍내로 올라 올 시기에 폭우가 내리면, 막힌 강하구 때문에 오십천이 범람하여 농작물이 유실됨은 물론, 많은 인명에도 손실을 입혔다.

 

이를 안타까이 여긴 허목은, 당나라 한퇴지(韓退之)가 조주(潮州)에서 악어를 제축(祭逐) 하였다는 고사를 근거로 하여,  해신을 달래는 축문 성격의 동해송(東海頌)을 1661년에 짓고, 다음 해인 1662년, 독창적인 전서체로 써서 처음 만리도(萬里島: 지금 큰방파제)에 비석을 세웠다. 그 신비로운 문장과 전서체의 위력이었든지 조수로 인한 피해가 많이 줄어들었던 것이다. 조수를 물리쳤다해서 일명 퇴조비(退潮碑)라 부르는 연유도 여기에 있다.

지금 육향산 동해비각 안에 서있는 비석의 앞면 큰 글자는 구본(舊本)이고, 뒷면의 작은 글자는 신본(新本)인 까닭은, 만리도에 세운 당초의 비석이 48년 뒤인 1708년 풍랑으로 부러져 바다에 빠져 두번째로 만들어졌기 때문이다. (컬럼을 쓰는 어떤 이는 후임으로 온 부사가 서인이어서 비석을 고의적으로 파손했다고 했으나, 동해안의 파도의 위력과 지방인의 정서로 보아 논거(論遽)가 희박하다고여겨진다.) 

비석의 파손 당시 삼척부사 홍만기(洪萬紀)는, 이미 허목선생의 사후(1862년 사망)였으므로 그에게 청할 수 없어 대안으로 사방으로 비문을 찾다가, 그의 문하생 한숙(韓塾)의 처소에서 원문을 구하여, 모사개각(模寫改刻)한 것을 1709년 2월 부사 박내정(朴乃貞)이 북간도 동쪽에 비각을 짓고 옮겨 세웠다는 게 설득력을 얻고 있다.

그 후 이 비석은 259년간 그 자리에 서 있다가, 음지로서 훼손을 염려한 지방유지들의 손으로 1969년 12월 6일,  현재 위치로 옮겨져 있다. 현판은 글씨는 역시 오세창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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州古悉直氏之地 左獩墟 南去京都七百里 東臨大海 都護府使 孔岩 許穆書

척주는 옛날 실직씨의 땅이요, 예나라의 터 남쪽으로, 서울로부터 700리요, 동쪽으로는 큰 바다에 임해 있다.도호부사 허목 쓰다.

 

瀛海漭瀁 百川朝宗 其大無窮 東北沙海 無潮無汐 號爲大澤

積水稽千 渤遹汪濊 海動有曀 明明暘谷 太陽之門 羲伯司賓

析木之次 牝牛之宮 日本無東 鮫人之珍 涵海百産 汗汗漫漫

奇物譎詭 宛宛之祥 興德而章 蚌之殆珠 輿月盛衰 蒡氣昇霏

天吳九首 壞夔一股 颱回且雨 出日朝暾 轇軋炫慌 紫赤滄滄

三五月盈 水鏡圓靈 列肅韜光 溥桑沙花 黑齒摩羅 撮莆家

蜑蠻之蠔 爪蛙之猴 佛齊之牛 海外雜種 絶黨殊俗 同咸育

古星遠德 百蠻衆譯 無遠不服 荒哉凞哉 大治鑛博 遺楓邈哉

 

동북쪽 사해(沙海))*1여서/밀물 썰물 없으므로/대택(大澤))*2이라 이름했네/

바닷물이 하늘에 닿아/출렁댐이 넓고도 아득하니/바다 움직이고*3 음산하네/

밝고 밝은 양곡(暘谷)*4으로/태양의 문이라서/희백(羲伯)*5이 공손히

해를 맞이하네/ 석목(析木)*6의 위차요/빈우(牝牛)*7의 궁(宮)으로/

해가 본시 돋는 동쪽의 끝이네/교인(鮫人)*8의 보배와/바다에 잠긴 온갖 산물은/

많기도 많아라/기이한 만물이 변화하여/너울거리는 상서로움이/

덕을 일으켜 보여주네/조개 속에 든 진주는/달과 더불어 성하고 쇠하며*9/

기운을 토하고 김을 올리네/머리 아홉인 괴물 천오(天吳)*10와/외발 달린 짐승 기(夔)*11는/

태풍을 일으키고 비를 내리네/아침에 돋는 햇살/찬란하고 눈부시니/

자주 빛 붉은 빛이 가득 넘치네/보름날 둥실 뜬 달/하늘의 수경이 되니/뭇별이 광채를 감추네/

부상과 사화(沙華)/흑치(黑齒)와 마라(麻羅)*12/상투 튼 보가(莆家)족*13/연만의 굴과 조개*14/

조와(爪蛙)*16의 원숭이/불제(佛齊)*17의 소들/바다 밖 잡종으로/무리도 다르고 풍속도 다른데/

한곳에서 함께 자라네/옛 성왕의 덕화가 멀리 미치어/

온갖 오랑캐들이 중역으로 왔으나/멀다고 복종하지 않은 곳 없었네/

아아, 크고도 빛나도다/그 다스림 넓고 크나니/그 치적은 영원히 빛나리.

 

*1 사해(沙海)) : 모래바다. "동해는 모래바다여서 비습(卑濕)한 기운이 없기 때문에 물이 쉽게 새서 조수가 일지 않는다"<미수(眉叟)의 척주기사(陟州記事)>

*2 대택(大澤)) : 큰 못. 곧 동해를 말함.

*3 바다 움직이고(海動有) : "동해는 항시 큰 바람이 많아 파도가 열 길이나 되는데 오직 서풍이 불면 바다가 고요하고, 서북풍(西北風 일명 여풍(厲風))이 불면 바다가 움직인다.” 했고 “바람이 없어도 파도가 이는 것을 해악(海惡)이라 한다.”고 했다.<미수(眉叟)의 척주기사(陟州記事)>

*4 양곡(暘谷) : 해 뜨는 곳. "희중(羲仲)에게 명하여 우이(嵎夷)에 살게 하니 곧 양곡(暘谷)이다.(分命羲仲  宅嵎夷 曰暘谷)" - 요임금은 관원을 뽑아 여러 소임을 분담 시켰는데,희백이라는 관원을 이(嵎夷)로 가도록 하였다. 우이는 동방을 가리키는 곳으로 우(嵎)는 즉 평원을 말하며, 태양이 언덕 위에 솟아 평지를 비치므로 동방을 뜻하는 것인데, 양곡(暘谷)이라고도 하였다. 양(暘)은 밝다는 말이며, 곡(谷)은 낮은 곳을 가리킨다.

이는 곧 낮은 곳에서 태양이 솟아올라 온누리에 비치므로 동방을 뜻하는 것이다.

                 <서경(書經)의 요전(堯典)>

*5 희백(羲伯) : 요(堯) 때에 천지(天地)ㆍ사시(四時)를 다스린 관원. - 요임금은 희씨(羲氏)와 화씨(和 氏)에게 명하시어 호천(昊天)을 공경하고 순하여 일월성진(日月星辰)을 역(曆)으로 하며 상(象)으로 하여, 공경하여 인시(人時)를 주라 하시다.(乃命羲和 欽若昊天 曆象日月星 敬授人時). 요임금은 희와 화라는 관원에게 명하여 자연의 변화상태를 면밀히 조사시켰다.

 광대한 하늘의 힘으로 말미암아 춘하추동의 변화가 일어나는 것이므로, 이 하늘의 움직임을 잘 조사하여 일월성진의 운행을 자세히 관찰한 후 역(曆)을 만들어 널리 백성들을 가르치자 정월이 어느 때이며, 씨앗을 뿌릴 때는 언제이고, 추수를 할 시기는 어느 때라고 알리라고하였다.<서경(書經)의 요전(堯典)> 

*6 석목(析木) : 성차(星次)의 이름으로 기(箕)ㆍ두(斗) 두 별 사이를 가리키며 정 동쪽 인방(寅方)에 해당한다. "석목의 나루는 기(箕)ㆍ두(斗)의 사이에 있으니 은한(銀漢)의 나루다"

<이아 (爾雅) 석천(釋天)> - 이아((爾雅)는 중국의 13경(經) 중의 하나인 동양자전(東洋

 字典),  이(爾)는 가깝다는 뜻, 아(雅)는 바르다라는 뜻. 이아는 곧 천문, 지리, 음악, 기재,

                  초목, 조수(鳥獸)의 문자에 대한 설명서. 

*7 빈우(牝牛) : 축방(丑方)에 있는 기(箕)ㆍ미(尾) 두 별자리.

*8 교인(鮫人) : 바다의 여신. 큰 잉어와 비슷하며 사지가 있고 갓난아기의 울음소리와 같은 음성을 낸다고 함. 곧 인어.- "교인은 고기와 같이 물속에서 살면서 비단 짜는 일을 하는데, 힘들어 울면 눈물이 모두 구슬을 이룬다."<술이기(述異記)>

*9 조개 속에 든 진주는/달과 더불어 성하고 쇠하며 : “소라가 구슬을 잉태하는데, 그 구슬은 달과 더불어찼다 줄었다 한다.”<좌사(左思)의 오도부(吳都賦)> 좌사는 '낙양지가(洛陽紙價)'를 끌내 올린 사람. 오도부는 그 삼도부(三都賦)인 촉도부(蜀都賦), 위도부(魏都賦)의 하나. 좌사는 제나라 사람으로 추남에 말더듬이였다. 그러나 붓을 잡으며 장려한 시를 지었다. 삼도부는 그가 장장 10년만에 완성했지만 알아주는 사람이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 장화(張華)라는 유명한 시인이 삼도부를 읽어 보고 격찬했다.이것은 반(班),장(張)의 유(流)이다." 후한(後漢) 때《양도부(兩都賦)》를 지은 반고[班固:

《한서(漢書)》저술],《이경부(二京賦)》를 쓴 장형(張衡)과 같은 대시인에 비유한 것이다.

러자《삼도부》는 당장 낙양의 화제작이 되었고, 고관대작은 물론 귀족,환관,문인,부호들이 그것을 다투어 베껴 썼다. 그 바람에 '낙양의 종이값이 올랐다[洛陽紙價貴]'고 한다. 그러나 오히려 그가 지은 《영시(詠詩)》가 더 중시되고 있다.

 

 

*10 천오(天吳)

  

   여덟 개의 사람 얼굴과 여덟 개의 다리와 여덟 개의 꼬리를 가진 천오(天吳)다.

 - 조양곡의 신을 천오라 하는데, 그는 물귀신이다. (중략)  그 생김은 여덟  개의 

     사람얼굴이며 여덟 개의 다리와 여덟 개의 꼬리를 지니고 있는데, 등은 청황색이다.

     (朝陽之谷, 曰天吳, 是爲水伯, (중략) 其爲獸也, 八首八面, 八足八尾, 背靑黃.)

   <산해경(山海經-海外東經)>

   * 본문에서 천오구수(天吳九首)라 하여 머리가 아홉 개라 하였는데 잘못된 부분이다.

    아래 그림이 <산해경-해내서경>에 나오는 개명수(開明獸)와 혼돈한 듯하다.

 

  얼굴 아홉 개를 가진 개명수다.

 

곤륜의 남쪽 못은 깊이가 300 길이다. 개명수는 몸 크기가 호랑이 비슷하고 아홉 개의

 머리를 가졌는데, 모두 사람의 얼굴이다. (昆侖南淵深三百仞, 開明獸身大類虎而九首,

 皆人面)<산해경-해내서경(海內西經)>

 

*11 기(夔)

 

 소같이 생겼는데 뿔이 없는 외발 짐승 기(夔)다

-동해 한가운데에 유파산이 있는데, 바다로부터 7,000리나 들어가 있다. 그 위에

  소같이 생긴 짐승이  있는데 푸른 몸빛에 뿔이 없고 외발이다. (이 짐승이) 물속으로

  드나들 때면 반드시 비바람이 일며 그 빛이 해와 달과 같고, 그 소리는 우뢰와 같다.

  이름을 기(夔)라고 한다. 황제가 이것을 잡아 그 가죽으로 북을 만들고, 뇌수(雷獸)의

 뼈를 (북채로 만들어) 두들기니 그 소리가 500리 밖까지 들려 천하를 놀라게 했다.

   (東海中 有流波山, 入海七千里, 其上有獸, 狀如牛, 蒼身而무角, 一足, 出入水則必風雨,

     其光如日月, 其聲如雷, 其名曰夔, 黃帝得之, 以其皮爲鼓, 以雷獸之骨, 聲聞五百里,

    以威天下)<산해경(山海經-대황동경_大荒東經)> 

 

 

  뇌수(雷獸)를 뇌신이라고도 한는데, 용의 몸에 사람의 머리를 하고 자신의 배를

  두드린다.(龍身而人頭, 鼓其腹). 한 번씩 두드리며 천둥소리로 울렸다고 한다.

      

*12 부상과 사화(沙華)/흑치(黑齒)와 마라(麻羅) : 동해 가운데 있는 나라와 남만의 종족이름. 부상은 해돋는 곳인데 일본의 별칭,사화는 동해에 있는 나라로 미지의 나라인데,

발음상 사할린과 유사하고 아무르강 하류 타타르해협의 나라, 또. 黑齒麻羅(흑치마라)는

 검은 이빨(흑치지국 : 그 나라 사람들의 이빨이 옻처럼 새카맣다 -곽박(郭璞) 산해경)의

흑치국과 마라국인데, 마라국은 동남아 말레이 반도의 나라들을 가리킴. 곧 말레이시아와 인도네시아. 흑치국은 중국남부 광서 장족 자치구를 말함. 이 지역 사람들은「빈랑(檳榔)」 이라는 열매를 씹어 이빨이 검게 염색됨.

*13 상투 튼 보가(莆家)족 : "보가족은 중국 동남해에 사는 부족명으로 귀족은 머리털을 머리 뒤로 모아 묶고 백성들은 머리를 박박 깎았다." <중국의 역사서 「삼재도회(三才圖會)」>

               -삼재도회(三才圖會)는 여러 가지 책을 모아 항목에 따라 분류하여 찾아보기 편리하게

               엮어 놓은 책이다. 명대(明代) 가정(嘉靖)·만력(萬曆) 연간(1522~1620)에 왕기(王圻)에

               이어 왕사의(王思義)가 편찬했다. 여러 책의 도감(圖鑑)을 모아 문자설명을 덧붙였으므로

               그림·문자가 모두 강조된 유서라고 할 수 있으며. 모두 106권이다, 천문·지리·인물·시령(時令

               :절기)·궁실(宮室)·기용(器用)·신체·의복·인사(人 事)·의제(儀制)·진보(珍寶)·문사(文史)·

               조수(鳥獸)·초목(草木) 등의 14부문으로 나누어져 있다. 고대 문물·인물 그림을 찾아보기

              위한 책이다.

 *14 연만의 굴과 조개 : "연만은 세 종족이 있는데, 한 종족은 어연(魚蜒)으로 낚시질을 잘하고, 다른 한

                종족은 호연(蠔蜒)으로 바다에 들어가 굴조개를 잘 잡고, 또 다른 한 종족은 목연(木蜒)으로

                나무를 베어 과일을 잘 딴다.” <중국의 역사서 「삼재도회(三 才圖會)」> 모두 가난하고

                미개한 부족들임.

*16 조와(爪蛙) : 조와국은 '파사국'이라고 조선말에 출판된 문헌비고는 기록했는데, 오늘날 파키스탄에서

               이라크에 이르는 지역을 말함.

*17불제(佛齊) : 불제국은 '그 나라에서 소를 신성시한다'고 했고,

               그 위치가 眞臘(진랍)과 파사의 사이에 있다고함. 곧 인도를 가르킴.

 

 

 

 

미수 허목은 누구인가.

허목은 경기도 연천 출신으로서 본관은 양천(陽川), 호는 미수(眉叟), 자는 문보(文甫), 화보(和甫),

시호는 문정(文正)이다. 현감인 아버지 허교(許喬)와 어머니 임씨 사이에서 1595년 12월 11일 지금

명륜동에서 태어났다. 19세 때 영의정 이원익의 증손녀와 혼인했다. 1615년 정언옹에게서 글을 배웠고,

이익(李瀷)의 조부 이지안(李志安.)과도 친교를 맺는다. 1617년 23세 때, 거창 현감으로 임명된 아버지를

따라 가서 모계(茅溪) 문위(文緯)의 문하에 들어가 학문을 닦으며, 그의 소개로 중형 허후(許厚)와 함께

영남의 남인의 거두 정구(鄭逑:1543-1620)를 찾아가 그의 문하생이 된다. 이를 계기로 평생 서인 거두

송시열과 맞서는 남인의 선봉에 서게 된다.

29세 때인 1624년, 광주(廣州) 자봉산(紫峯山)에 들어가 그의 독특한 필체인 고전팔분체(古篆八分體)를

완성하였다. 1626년 유생으로서 동학의 재임을 맡고 있을 때, 생부 정원대원군을 왕으로 추숭하려는 인조의

뜻을 지지한 박지계(朴知誡)를 유생 명부에서 지우는 벌을 가했다가 과거 응시를 금지하는 처벌을 받아

평생 임용과거를 보지 못했다.

1657년 공조정랑, 1659년에 장령에 임명되자 상소를 올려 송시열, 송준길 등의 정책을 반대하는 등 중앙

 정부에서 정치활동을 시작하였다. 이듬해 인조 계비 조대비(趙大妃)의‘예송(禮訟) 논쟁’ 에 연유되어 서인

송시열과의 당쟁에서 밀려 삼척부사로 부임하여 향악과 읍지를 편찬하는 등 가장 활발한 활동을 보였다.

1674년 남인이 집권하여 대사헌에 임명되었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이듬해 성균관제주를 비롯하여 이조참판,

우참찬, 이조판서를 거쳐 우의정에 임명되어 과거를 거치지 않고 정승까지 진출하는 흔치 않은 인물이 되었다.

 1680년 남인이 실각할 때 관직을 삭탈 당하고 87세 나이로 세상을 떠날 때까지 고향 연천에서 후진들을 양성했다.

그는 노년에 징파강 상류에 살면서 매일같이 낚시를 즐겼던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현재 허목의 묘역은 연천군 왕징면 강서리에 남아 있다. 당파싸움에 선봉장으로 섰었는데,

그의 비석은 훗날 6.25전쟁으로 탄흔을 가득 안게 되었다. 많은 것을 생각케 해 준다.

 

사상적으로 이황, 정구의 학통을 이어받아 이익에게 연결시킴으로써 기호 남인의 선구이며 남인 실학파의

기반이 되었던 인물이다. 시, 서, 역, 춘추, 예의 오경 속의 원시 유학의 세계에 깊은 관심을 보였다. 또 제자백가와

경서를 연구하여 예학(禮學)에도 많은 관심을 보였다. 특히 중국 진한 이전의 문물에 대한 탐구는 문자에도

적용하여 전서(篆書)에 독보적인 경지를 이뤄냈다. 학(學),문(文),서(書)에 두루 능하여 당대 사람들은 삼고(三古)라

불렀다. 그의 저서로는 동사(東史), 방국왕조례(邦國王朝禮), 경설(經說), 경례유찬(經禮類簒),미수기언(眉叟記言)

등이 있으며, 글씨로는 삼척의 척주동해비, 그림으로 묵죽도(墨竹圖) 등이 전한다.

 

 

 

                                                      삼척부사로 재임 시 저술한 척주지(陟州誌)

 

  내가 처음으로 접했던 허목의 저술인 동사(東史). 1978년 박영사(博英社) 문고판

 

한편 그의 전서에 대하여 좋은 평만 있는 게 아니다. 당시 온건한 필법으로 서예계를 대표하던 이정영(李正英)같은

이는, 허목의 광서괴행(狂書怪行)을 마땅치 않게 여겨 왕에게까지 그의 서체를 못 쓰도록 청한 일도 있었으며, 어떤

이는 설문해자에 준하지 않고 금석운부(金石韻府)와 같이 조작된 글자가 많은 자본(字本), 또는 후인의 위작(僞作)이라는

하우(夏禹)의 비 등을 답습했다해서 ' 전서의 잡전(雜篆)' 이라고 혹평을 하기도 했다.

 

 

 

* 대한평수토찬비(大韓平水土贊碑)(지방유형문화재 제38호)

 

                                                                                                              대한평수토찬비의 전서체

 

 

                                                        대한평수토찬비의 비각인 우전각(禹篆閣)

 

 
평수토찬비 비문 역시 삼척 부사 허목이 짓고 쓴 것이다. 

그가 백이숙제의 나라 죽국(竹國)에 사신으로 갔을 때, 죽국에서 3,700년만에 지하에서 발굴된 하우(夏禹)의

형산비(衡山碑)가 있는 것을 알아내어, 그 글씨체로 중국 형산비(衡山碑)의 대우수전(大禹手篆) 77자 가운데

48자를 가려서 새긴 것이라 전하고 있다. 내용은 임금의 은총과 수령으로서 자신의 치적을 기린 글이다.

현종 원년(1661) 목판에 새기어 읍사(邑司)에 보관되어 오다가 240여년 후인 광무 8년(1904) 칙사(勅使) 강홍대와

삼척군수 정운철 등이 왕명에 의해 석각하여 죽관도에 건립하였다. 비의 높이는 145cm, 폭 72cm, 두께 22cm이며,

비각의 전 면에 "우전각(禹篆閣)" 제액이 게판되어 있다.

 

                                                                                        대한평수토찬비의 48자(字)

 

대한평수토찬비의 48자를 보면 문자라기보다 마치 동물원의 동물들을 보고, 그 느낌을의 표현해 놓은

것 같게 보인다. 그도  중국의 기서(奇書)로 알려진 산해경(山海經)에나 나오는 짐승들의 형상과 유사

하다. 하기야 상형문자의 바탕인 금석문자가 그러했으니 일리도 있다고 하겠다.

분명 허목의 척주동해비를 등장하는 짐승들을 보면, 그도 산해경에 나오는 짐승들에 흥미를 느꼈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시대 사람들이 남긴 문집들에서 그가 괴이한 것에 관심이 많았다고 전언하고 있기

때문이다.

 

 3)대한평수토찬비大韓平水土贊碑

 

 대한평수토찬비문大韓平水土贊碑文  역시 삼척 부사  미수허목眉叟許穆이 짓고 쓴 것이다. 그가 백이숙제의 나라 죽국竹國에 사신으로 갔을 때, 죽국에서 3,700년만에 지하에서 발굴된 하우夏禹의 「형산비衡山碑」가 있는 것을 알아내어, 그 글씨체로 중국 형산비衡山碑의 대우수전大禹手篆 77자 가운데 48자를 가려서 새긴 것이라 전하고 있다.   내용은 임금의 은총과 수령으로서 자신의 치적을 기린 글이다.

현종 원년(1661) 목판에 새기어 읍사邑司에 보관되어 오다가 240여년 후인 광무 8년(1904) 칙사勅使 강홍대와 삼척군수 정운철 등이 왕명에 의해 석각하여 죽관도에 건립하였다. 비의 높이는 145cm, 폭 72cm, 두께 22cm이며, 비각의 전 면에 「우전각禹篆閣」제액이 게판되어 있다.      

                  

  

                                                        대한평수토찬비의 비각인 우전각(禹篆閣)

 

    

                                                                              대한평수토찬비의 48자(字)복사본

                                                                                                                                                 

 

  대한평수토찬비의 48자를 보면 문자라기보다 마치 동물원의 동물들을 보고, 그 느낌을 표현해 놓은 것 같게 보인다.그도  중국의 기서奇書로 알려진 『산해경山海經』에나 나오는 짐승들의 형상과 유사하다. 하기야 상형문자의 바탕인 금석문자가 그러했으니 일리도 있다고 하겠다.

분명 허목의 척주동해비에 등장하는 짐승들을 보면, 그도 산해경에 나오는 짐승들에 흥미를 느꼈을지도 모르는 일이다.시대 사람들이 남긴 문집들에서 그가 괴이한 것에 관심이 많았다고 전언하고 있기때문이다.

 

                           久旅忘家翼輔承帝

                      勞心營知衰事與制

                      泰華之定池瀆其平

                      處水奔麓魚獸發形

                      而岡弗亨伸盃疏塞

                      明門輿庭永食萬國

 

                           집을 떠난지 오랜동안

                           임금의 뜻을 받들어서

                           온갖 지혜 다 짜네

                           열심히 일하고 규범을 만들었더니

                           땅이 안정되고

                           물이 고요해져서

                           물에도 땅에도

                           어수가 제 모습을 나타내니

                           형통하게 되었고

                           비색함이 없어져

                           밝은 사회 이룩되어

                           영원토록 잘 살리
  

 
 삼척부사  미수허목眉叟許穆
  허목(1595~1682)이 삼척부사로 근무한 때는 1660년(현종 1) 10월부터 2년 남짓한 기간이었다. 그는 56세에 정릉참봉이라는 말직으로 벼슬길을 시작했고, 63세에는 산림山林 출신으로 사헌부 지평이 되었다.1659년 효종이 사망하자 모친인 자의대부의 복상 기간을 두고 예송이 있었는데, 허목은 일년복을 주장하는 송시열에 맞서 삼년복을 주장하다가 삼척부사로 좌천되었다.

 

삼척으로 부임할 때 허목은 나이는 66세, 인생의 황혼기로 접어들고 있었다. 삼척은 백두대간이 동해와 맞닿은 곳에 위치한 동쪽 끝의 고을이었다. 원래 이곳에는 실직국悉直國이 있었는 데, 파사왕 때 신라에 투항했고, 지증왕 때 이사부가 이곳 군주로 있다가 하슬라주 군주가 되어 우산국(울릉도)을 평정했다.

 

조선시대에 삼척은 왕실의 주목을 받았는 데, 태조 이성계의 4대조인 목조穆祖의 외가이자 목조가 거처했던 곳이기 때문이다. 이곳에 부사로 부임한 허목은 매우 다양한 활동을 펼쳤다. 삼척 사람들은 검소하고 질박하지만 비非유교식 제사인 음사淫祀를 좋아하는 풍습이 있었다. 이에 허목은 유교식 예제를 보급하는 일에 진력했는 데, 각 고을에 향약을 보급하고, 이사里社를 설치하여 풍년을 비는 제례를 올렸으며, 제례를 마치면 고을의 연장자들이 모여 향음주례를 거행하게 했다.

 

허목은 삼척의 명승지를 돌아보고 중요한 건물을 증축했다. 그는 대표적 명승지인 죽서루竹西樓에 올라가 멋진 경치를 감상하고, 현판 글씨를 남겼다. 죽서루 옆에는 서별당이란 관아 건물이 있었는 데 오랫동안 돌보지 않아 퇴락해 있었다. 허목은 이 건물을 중수하고 기문記文을 지었다. 허목은 두타산을 유람한 「두타산기頭陀山記」를 남겼는 데, 삼화사, 호암, 반학대, 중대사, 학소대, 석봉을 거치는 경로였다. 삼척부 읍치에는 광해군 때 삼척부사로 왔던 김효경의 공적을 기리는 사당이 있었는데, 역시 퇴락해 있었다. 허목은 이 건물을 옮겨 짓고 제사를 지냈으며, 이를 기록한 기문을 지었다.

 

동해에는 바람이 많고 파도가 심했는 데, 특히 장마철이 되면 강 하구가 막히고 오십천이 범람하여 백성들에게 막대한 피해를 입혔다. 허목은 해일 피해를 막기 위해 바닷가에 우임금의 전서체로 쓴 비석을 세웠는 데, 이것이 바로 척주동해비陟州東海碑이다. 이 비석은 허목의 글씨가 일품인 데다 도가와 주술적인 비유들이 들어있어 매우 특이하면서도 기괴하다. 척주동해비의 탁본은 물과 불이 침범하지 않는 효과가 있다고 하여 부적처럼 사용되었는 데, 이 비의 탁본은 지금까지도 유행하고 있다.

삼척 미로리未老里에는 예전부터 목조 부모의 묘소가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동국여지승람』의 기록에 근거한 것인데, 목조 부친의 묘소는 읍치 서쪽으로 45리 떨어진 노동에, 모친의 묘소는 30리 떨어진 동산에 있다고 했다. 조선 왕실에서는 선대의 묘소를 찾아 수호하려는 노력을 계속했지만, 선조 때까지 묘소의 위치를 확정하지 못했다. 1662년에 허목은 이를 고증하는 「노동이묘기蘆東二墓記」를 작성했는 데, 목조가 살았던 옛 집터와 텃밭이 발견되었으므로 그 인근에 있는 두 묘소가 진짜일 가능성이 크다는 입장이었다. 허목의 기록은 1899년에 고종 황제가 삼척에 준경묘濬慶墓와 영경묘永慶墓를 조성하는 중요한 근거가 되었다.

허목의 업적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은 삼척 지역의 지리지인 『척주지陟州誌』 2권을 편찬한 것이다. 허목은 관아에서 근무하는 틈틈이 고을의 노인들을 찾아서 예전부터 전해지는 이야기를 들었고, 관아의 서리들이 보관하던 고문서와 『동국여지승람』 등의 기록을 대조하면서 관련 자료들을 정리했다. 허목은 자신이 현지에서 활동한 사항도 상세히 기록했는 데, 위에서 언급한 행적은 모두 이에 근거한 것이다.

허목이 삼척으로 간 것은 중앙 정계에서 밀려나 지방으로 좌천되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삼척으로 좌천될 당시 그는 66세의 노인이었으므로, 실망과 한숨으로 시간을 보낼 수도 있었다. 그러나 허목이 삼척에서 이룩한 업적은 매우 다양하면서도 의미가 있었다.  갖은 악조건에도 자신의 일에 최선을 다하고 끝내 유의미한 성과를 거둬들이는 허목의 행적에서 ‘실학자’로서의 풍모를 발견하게 된다.  


                       참고자료 : 『三陟市誌』삼척시 1997,
悉直文化제3집 삼척문화원 1992,

                                      「삼척부사 허목」김문식 단국대 사학과교수

 

출처 : 강석정의 사랑방
글쓴이 : 보중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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