歸去來辭(귀거래사) - 도연명(陶淵明)
歸去來兮
(귀거래혜) 돌아가리라!
田園將蕪胡不歸
(전원장무호불귀) 전원이 황폐해 지려는데 어찌 아니 돌아가리.
旣自以心爲形役
(기자이심위형역) 이미 스스로 마음이 몸의 부리는 바가 되었거니,
奚惆悵而獨悲
(해추창이독비) 무엇이 서러워 홀로 슬퍼하고 있으리.
悟已往之不諫
(오이왕지불간) 이미 지난 것은 탓 할 수 없음을 깨달았으니,
知來者之可追
(지래자지가추) 앞일을 쫓아감이 옳은 것임을 알도다.
實迷途其未遠
(실미도기미원) 사실 길은 어긋났으나 그리 멀어진 건 아니니,
覺今是而昨非
(각금시이작비) 지금이 바른 길이며 지난날이 틀렸음을 깨달았도다.
舟遙遙以輕颺
(주요요이경양) 배는 흔들흔들 가볍게 떠서가고,
風飄飄而吹衣
(풍표표이취의) 바람은 산들산들 옷자락을 날리누나.
問征夫以前路
(문정부이전로) 지나는 이에게 앞길을 물어서 가니,
恨晨光之熹微
(한신광지희미) 새벽빛이 희미한 것이 한스럽기만 하다.
乃瞻衡宇
(내첨형우) 드디어 집이 멀리 바라다 보이니,
載欣載奔
(재흔재분) 기쁜 마음에 뛰어서 가네.
童僕歡迎
(동복환영) 머슴아이 반가이 맞이하고,
稚子候門
(치자후문) 어린 아이들 문 앞에 기다리고 있네.
三徑就荒
(삼경취황) 세 갈래 오솔길은 잡초에 묻혔어도,
松菊猶存
(송국유존) 소나무와 국화는 그대로 남아 있네.
携幼入室
(휴유입실) 어린 놈 대리고 방으로 들어서니,
有酒盈樽
(유주영준) 술항아리 가득히 술이 채워져 있네.
引壺觴以自酌
(인호상이자작) 술병과 잔 가져다가 혼자 따라 마시며,
眄庭柯以怡顔
(면정가이이안) 뜰 안 나무 가지를 바라보며 기쁜 얼굴을 하네.
倚南窗以寄傲
(의남창이기오) 남쪽 창에 기대어 거만을 떨어보니,
審容膝之易安
(심용슬지이안) 작디작은 방이지만 편안함을 느끼도다.
園日涉以成趣
(원일섭이성취) 정원을 매일 거닐어 정취가 생겨나고,
門雖設而常關
(문수설이상관) 문은 달려 있으나 늘 닫아 두고 있네.
策扶老以流憩
(책부노이류게) 지팡이 짚고 이리저리 거닐다 쉬기도 하고,
時矯首而遐觀
(시교수이하관) 때로는 고개 들어 멀리 바라본다.
雲無心以出岫
(운무심이출수) 구름은 무심히 골짝에서 피어오르고,
鳥倦飛而知還
(조권비이지환) 새도 날다 지치면 돌아올 줄을 아네.
景翳翳以將入
(경예예이장입) 해도 뉘엿뉘엿 넘어가려 하는데,
撫孤松而盤桓
(무고송이반환) 외로운 소나무 어루만지며 자리 뜰 줄 모르네.
歸去來兮
(귀거래혜) 돌아왔도다!
請息交以絶遊
(청식교이절유) 사귐도 그만두고 어울림도 끊으리라.
世與我而相違
(세여아이상위) 세상과 나는 서로 어긋나기만 하니,
復駕言兮焉求
(복가언혜언구) 다시 벼슬길 올라서 무엇을 얻겠는가.
悅親戚之情話
(열친척지정화) 친척들과 정담을 즐기고,
樂琴書以消憂
(낙금서이소우) 거문고와 서책을 즐기며 근심을 삭이리.
農人告余以春及
(농인고여이춘급) 농부가 나에게 봄이 왔음을 알려주니,
將有事於西疇
(장유사어서주) 서쪽 밭에 나가서 할 일이 있겠구나.
或命巾車
(혹명건차) 때로는 천막을 두른 수레를 몰기도 하고,
或棹孤舟
(혹도고주) 때로는 외로운 나룻배 노를 저었다.
旣窈窕以尋壑
(기요조이심학) 이윽고 깊고 깊은 골짝을 찾아가고,
亦崎嶇而經丘
(역기구이경구) 또한 험하고 가파른 언덕길도 지났다네.
木欣欣以向榮
(목흔흔이향영) 나무들은 무성하게 가지를 뻗고,
泉涓涓而始流
(천연연이시류) 샘물은 졸졸 흘러내린다.
善萬物之得時
(선만물지득시) 만물이 제철을 만나 보기가 좋건마는,
感吾生之行休
(감오생지행휴) 나의 삶 가다 멈출 생각에 가슴이 벅차구나.
已矣乎
(이의호) 아서라!
寓形宇內復幾時
(우형우내복기시) 세상에 머물 날이 다시 얼마이랴!
曷不委心任去留
(갈불위심임거류) 마음을 어찌, 가고 머무는 순리에 맡기지 아니하랴!
胡爲乎遑遑欲何之
(호위호황황욕하지) 어디로 가려고 그리 서두르는가?
富貴非吾願
(부귀비오원) 부귀는 내가 바라던 바도 아니었고,
帝鄕不可期
(제향불가기) 하늘나라는 기약할 수 없는 일.
懷良辰以孤往
(회양진이고왕) 날씨 좋다 싶으면 홀로 나가 거닐다,
或植杖而耘자
(혹식장이운자) 가끔 지팡이 세워 두고 김매고 북돋우네.
登東皐以舒嘯
(등동고이서소) 언덕에 올라가서 노랫가락 읊조리고,
臨淸流而賦詩
(임청류이부시) 맑은 시냇가에 나와 시도 지어보네.
聊乘化以歸盡
(요승화이귀진) 오로지 자연의 조화에 따르다 돌아가고 마는 것을,
樂夫天命復奚疑
(낙부천명복해의) 천명을 누렸으면 그만이지, 더 무엇 의심하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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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동진시대 <도연명 375~427>이 지은 <귀거래사>를 명나라 말기의 유명한 서예가 <동기창 1555~1636>이 유려한 행서로 써 냈습니다.
깔끔한 서체로 유려하게 써 냐려간 명필 글씨라 귀거래사를 한층 돋보이게 해 주는 것 같아 서예를 좋아하는 분들을 위하여 올립니다.
1600여년 전에 지어진 이 귀거래사는 중국 뿐만 아니라 우리나라를 비롯한 한문 문화권에 문학면이나 사상적으로 지대한 영향을 끼쳤습니다.
동기창 (중국 명 [明] 화가) [동사백]
출처: 브리태니커
(병)Dong Qichang (웨)Tung Ch'ich'ang.
1555 중국 장쑤 성[江蘇省] 화정(華亭)~1636.
중국의 화가·서예가·화론가.
명대(明代) 말기의 가장 뛰어난 예술가 가운데 하나로 손꼽힌다. 당대 가장 유명한 미술전문가였던 그가 제시한 개념들은 중국 미학(美學) 이론에 계속 영향을 미쳤다. 가난한 사대부 집안에서 태어나 처음에는 과거시험에 떨어졌지만 34세 때인 1589년에 진사시험에 합격하여 처음 관직에 올랐고, 그후 잇달아 명 조정의 관직을 맡았다.
그는 중국화에 대한 저술로 가장 잘 알려져 있다. 연상의 동료이자 친구인
막시룡(莫是龍 : 1537~87)이 처음 제시한 방법에 따라 중국화를 '
북종화'(北宗畵)와 '
남종화'(南宗畵)로 나누고, 그 계보를 추적하여 2갈래 전통을 분석했다. 남종화는 순간적이고 직관적인 진리의 깨달음을 강조한 반면, 북종화는 그러한 통찰력을 보다 점진적으로 터득하도록 가르쳤다고 주장했다. 남종화파에 속하는 화가들은 감수성이 예민한 시인과
문인화가들이었는데, 이들은 그림의 기능이나 아름다움을 의식적으로 생각지 않고 직관적으로 그렸기 때문에, 대중의 취향보다는 비슷한 감수성을 가진 상류층 지식인들에게 더 호소력을 갖고 있었다. 이와는 반대로, 북종화파의 '직업' 화가들은 자기 내면의 본질을 거의 나타내지 않고 즉각적인 시각적 호소력을 지닌 아름다운 화면을 창조하려고 애썼다. 남종화파가 추구한 학자적 이상 한가운데에는
서예가 있었다. 서예는 회화적 묘사를 전혀 개입시키지 않고 운필(運筆)하는, 한 개인의 진정한 본질을 추상적으로 표현하는 것이다.
동기창의 서예는 유명한 서예가인
조맹부(趙孟頫)와
문징명(文徵明), 그리고 궁극적으로는 진(晉)과 당(唐)의 대가들의 뒤를 이었다. 조맹부나 문징명과 마찬가지로, 동기창의 창작적 접근방식은 진지하고 잘 단련되어 있으며 학구적이고 체계적이다. 또한 고대의 문화를 되살리려고 노력하는 과정에서 본보기로 삼은 서체의 겉모습을 맹목적으로 답습하기보다는 그 정신을 파악하고자 했다.
동기창은 특히
원4대가(元四大家)인 황공망(黃公望)·오진(吳鎭)·왕몽(王蒙)·예찬(倪瓚)을 좋아했다. 이들은 모두 문인화가로서 가장 높은 이상을 보여주는, 사심없는 성격과 개성적인 표현양식을 갖고 있었다. 동기창의 그림은 표현양식과 소재에서는 그들에게서 받은 영향을 드러내고 있지만, 예술에서 직관적인 미감(美感)을 모두 추방하는 대신, 있는 그대로의 형태와 겉보기에 파격적인 공간 묘사, 그리고 필묵(筆墨)의 부자연스런 운용을 강조했다는 점에서는 그들을 상당히 능가했다. 동기창의 글은 그의 다양한 저서에 뿐만 아니라 그림에도 실려 있다. 저서로는 〈화안 畵眼〉·〈화지 畵旨〉·〈화선실수필 畵禪室隨筆〉 등의 문집이 있다.
도연명<陶淵明>
(병)Tao Yenming(웨)Tao Yenming.
365~427.
중국의 대표적 시인.
이름은 잠(潛). 호는 오류선생(五柳先生). 연명은 자이다. 동진(東晉) 말기부터 남조(南朝)의 송(宋:劉宋이라고도 함) 초기에 걸쳐 생존했다.
강주(江州) 심양군(尋陽郡:지금의 장시 성[江西省] 주장[九江]) 시상현(柴桑縣:지금의 싱쯔 현[星子縣])에서 태어났다. 그의 가문은 대대로 남방의 토착 사족(士族)으로, 북조로부터 내려온 귀족이 절대적 실권을 장악하고 있던 당시의 남조 사회에서는 영달의 길에서 소외된 압박받는 계층이었다. 그러나 도연명이 평생 동경했던 증조부 도간(陶侃:259~334)은 동진 초에 장사군공(長沙郡公)·대사마(大司馬:최고군사령관)까지 승진했고, 할아버지 도무(陶茂)도 무창(武昌)의 태수(太守)로 재임했다. 그러나 아버지는 은둔생활을 했기 때문에 이름조차 알려져 있지 않다. 어머니는 정서대장군(征西大將軍) 환온(桓溫)의 장사(長史:막료장)였던 맹가(孟嘉)의 넷째 딸이었다. 도연명은 그 사이에서 태어난 외동아들이었던 것 같다. 도연명의 첫번째 관료생활은 29세 때 자기가 살고 있던 강주의 좨주(祭酒:州의 교육장)로 취임한 것이었으나 곧 사임했다. 2번째 관료생활은 35세 때 당시 진(晉)나라 최대 북부군단(北府軍團)의 진군장군(鎭軍將軍)인 유뢰지(劉牢之)의 참군(參軍:참모)으로 취임한 것인데 이것 역시 곧 그만두었다. 3번째는 유뢰지의 휘하를 떠난 직후, 36~37세 무렵 형주(荊州:지금의 장링[江陵]) 자사(刺史) 환현(桓玄)의 막료로 취임한 것이다. 그러나 며칠 안되어 모친상을 당해 고향인 심양으로 돌아가 3년상을 치렀다. 이후 강주자사·참군 및 팽택(彭澤) 현령(縣令) 등의 관료생활은 고향에서 가까운 심양군 안에서 지냈다.
도연명이 10여 년에 걸친 관료생활을 최종적으로 마감하고 은둔생활에 들어간 시기는 의희(義熙) 원년(405) 11월 41세 때였다. 그는 팽택 현령이 된 지 겨우 80여 일 만에 자발적으로 퇴관했다. 퇴관의 결정적인 동기에 관해서는 다음의 유명한 일화가 있다. 그해말에 심양군 장관의 직속인 독우(督郵:순찰관)가 순찰을 온다고 하여 밑의 관료가 "필히 의관을 정제하고 맞이 하십시오" 하고 진언했더니, 도연명은 "오두미(五斗米:월급) 때문에 허리를 굽혀 향리의 소인을 섬기는 일을 할 수 있을손가"라고 말한 뒤 그날로 사임하고 집에 돌아갔다고 한다(〈宋書〉 隱逸傳). 또 한편으로 이때의 사퇴 동기에 관해서 도연명 자신은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취임해서 어느 정도 되자 집에 돌아가고 싶은 기분이 들었지만 그럭저럭 벼가 익거든 빠져나가려고 생각하던 차에 누이의 부음이 들려오자 조금도 참을 수 없게 되어 스스로 사임하고 집에 돌아왔다"(〈歸去來辭〉 序). 이때 나온 작품이 유명한 〈귀거래사〉·〈귀전원거오수 歸田園居五首〉이다.
이리하여 도연명은 이후 죽을 때까지 20여 년 간 은둔생활에 들어갔다. 고향에 은거한 지 3년째 되는 해에 갑작스런 화재로 생가가 타버리자 그는 일가를 거느리고 고향을 떠나 주도인 심양의 남쪽 근교에 있는 남촌(南村:또는 南里)으로 이사해서 그곳에서 만년을 보내게 되었다. 이사한 후 술을 좋아하던 그는 차츰 빈궁한 생활로 접어들었다. 그러나 이사를 함으로써 잃어버린 것만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그는 강주의 장관
왕홍(王弘)을 비롯해서 은경인(殷景仁)·
안연지(顔延之) 등 많은 관료·지식인과 친교를 맺을 수 있었다. 그가 후세에 이름을 남길 수 있었던 것도 후에 남조 송의 내각과 문단의 지도자가 된 왕홍과 안연지를 친구로 두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도연명의 시문으로 현재 남아 있는 것은 4언시(四言詩) 9수, 5언시 115수, 산문 11편이다. 이중 저작연대가 명확한 것이나 대강 알 수 있는 것은 80수뿐이다. 그밖의 것은 중년기 이후, 즉 그가 은둔생활을 보낸 약 20여 년 간에 지어진 것으로 추측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