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시.한시.

[스크랩] 척주동해비 해석

미르뫼 2014. 5. 22. 18:21

                      
                  육향산정의 척주동해비각
   취렴산방翠蘞山房 2011
                                                                     
 
 

 

 

                                

                                                                                               척주동해비 전면 
               
                                                                                                  

 척주동해비문陟州東海碑文 삼척부사 미수허목眉叟許穆이 지은 것으로 비의 규모는 높이 170cm, 너비 76cm, 두께 23cm이다. 1662년 현종 3년에 건립한 척주동해비는 일명 퇴조비退潮碑라 불리듯이 조류潮流의 피해를 막기 위해 건립되었으며, 당초에는 만리도에 건립되었다. 이후 1708년 숙종 34년에 풍랑으로 비석이 부러져 바다에 잠겼던 것을 동왕 35년 부사 홍만기가 글文을 본떠서 다시 새겼으며, 동왕 36년 삼척 부사 박내정이 죽관도 동쪽에 다시 건립하였다가 1969년 12월 6일 현재의 위치인 육향산 산정에 이건하였다. 현재 강원도 유형문화재 제38호로 지정되어 있으며, 비각의 전면에 [척주동해 비각] 제액과 후면에 [동해비각] 제액이 게판되어 있다.

  

                                                                               척주동해비문陟州東海碑  

 

척주동해비 해석 

                                           

州古悉直氏之地  左墟濊南去 京都七百里  東臨大海 都護府使  孔岩 許穆書

척주는 옛날 실직씨의 땅이요, 예나라의 터 남쪽으로, 서울로부터 700리요, 동쪽으로는

큰 바다에 임해 있다. 도호부사 허목 쓰다. 

 

瀛海漭瀁 百川朝宗 其大無窮 東北沙海 無潮無汐 號爲大澤 

積水稽天 浡潏汪濊 海動有曀 明明陽谷 太陽之門 義伯司賓

析木之次 牝牛之宮 日本無東 鮫人之珍 涵海百産 汗汗漫漫
奇物譎詭 宛宛之祥 興德而章 蚌之胎珠 與月盛衰 傍氣昇霏

天吳九首 恠蘷一股 颷囘且雨 出日朝暾 轇軋炫煌 紫赤滄滄

三五月盈 水鏡靈 列宿韜光 扶桑沙華 黑齒麻羅 撮䯻莆家

蜓蠻之蠔 瓜蛙之猴 佛齊之牛 海外雜種 絶黨殊俗 同囿咸育

古聖遠德 百蠻重譯 無遠不服 皇哉熈哉 大治廣愽 遺風邈哉

                          

큰 바다 끝없이 넓어서
온갖 냇물 모여드니                           

그 큼이 무궁하여라
동북쪽 사해沙海*1 여서
밀물 썰물 없으므로
대택大澤*2 이라 이름했네

바닷물이 하늘에 닿아서

출렁댐이 넓고도 아득하니

바다 움직이고*3 음산하네

밝고 밝은 양곡暘谷*4으로/태양의 문이라서

희백羲伯*5이 공손히 해를 맞이하네

석목析木*6의 위차요

빈우牝牛*7의 궁宮으로

해가 본시 돋는 동쪽의 끝이네

교인鮫人*8의 보배와

바다에 잠긴 온갖 산물은

많기도 많아라

기이한 만물이 변화하여

너울거리는 상서로움이

덕을 일으켜 보여주네

조개 속에 든 진주는

달과 더불어 성하고 쇠하며*9

기운을 토하고 김을 올리네

머리 아홉인 괴물 천오(天吳)*10

외발 달린 짐승 기夔*11

태풍을 일으키고 비를 내리네

아침에 돋는 햇살

찬란하고 눈부시니

자주 빛 붉은 빛이 가득 넘치네

보름날 둥실 뜬 달

하늘의 수경이 되니

뭇별이 광채를 감추네

부상과 사화沙華

흑치黑齒와 마라麻羅*12

상투 튼 보가家족*13

연만의 굴과 조개*14

조와爪蛙*15의 원숭이

불제佛齊*16의 소들

바다 밖 잡종으로

무리도 다르고 풍속도 다른데

한곳에서 함께 자라네

옛 성왕의 덕화가 멀리 미치어

온갖 오랑캐들이 중역으로 왔으나

멀다고 복종하지 않은 곳 없었네

아아, 크고도 빛나도다

그 다스림 넓고 크나니

그 치적은 영원히 빛나리.

  

 

註/ 陟州東海碑 ----------------------------------------------------------

 

*1 사해沙海 : 모래바다. "동해는 모래바다여서 비습卑濕한 기운이 없기 때문에 물이 쉽게 새서

                       조수가 일 지 않는다"<미수眉叟의 착주기사陟州記事>

*2 대택大澤 : 큰 못. 곧 동해를 말함.

*3 바다 움직이고海動有 : "동해는 항시 큰 바람이 많아 파도가 열 길이나 되는데 오직 서풍이 불면

                   바다가 고요하고 서북풍(西北風 일명 여풍이 불면 바다가 움직인 다.” 했고 또,

                  “바람이 없어도 파도가 이는 것을 해악海惡이라 한 다.”고 했다.<미수眉叟의 척주기사

                  陟州記事>

*4 양곡暘谷 : 해 뜨는 곳. "희중羲仲에게 명하여 우이禹夷에 살게 하니 곧 양곡이다.”<서경書經의

                     요전堯典>

*5 희백羲伯 : 요堯 때에 천지天地ㆍ사시四時를 다스린 관원.

*6 석목析木: 성차星次의 이름으로 기箕ㆍ두斗 두 별 사이를 가리키며 정 동쪽 인방寅方에

                     해당한다. "석목의 나루는 기箕ㆍ두斗의 사이에 있으니 은한銀漢의 나루다.” <이아

                    爾雅 석천釋天>

*7 빈우牝牛 : 축방丑方에 있는 기箕ㆍ미尾 두 별자리.

*8 교인鮫人 : 바다의 여신. 큰 잉어와 비슷하며 사지가 있고 갓난아기의 울음소리와 같은 음성을 낸

                     다고 함. 곧 인어. "교인은 고기와 같이 물속에서 살면서 비단 짜는 일을 하는데, 힘들어

                     울면 눈물이 모두 구슬을 이룬다."<술이기述異記>

*9 조개 속에 든 진주는/달과 더불어 성하고 쇠하며 : “소라가 구슬을 잉태하는데, 그 구슬은 달과 더불어

                    찼다 줄었다 한다.”<좌사左思의 오도부吳都賦>

 

*10 천오天吳

  

  여덟 개의 사람 얼굴과 여덟 개의 다리와

                                                                                       여덟 개의 꼬리를 가진 천오天吳다

        

 - 조양곡의 신을 천오라 하는데, 그는 물귀신이다. (중략) 그 생김은 여덟 개의 사람 얼굴이며 여덟

    개의 다리와 여덟 개의 꼬리를 지니고 있는 데, 등은 청황색이다.(朝陽之谷, 曰天吳, 是爲水伯,

    (중략) 其爲獸也, 八首八面, 八足八尾, 背靑黃.) <산해경山海經-海外東經>

 * 본문에서 천오구수天吳九首라 하여 머리가 아홉 개라 하였는 데 잘못된 부분이다.

 

*11 기夔

 

 소같이 생겼는데 뿔이 없는 외발 짐승 夔다.

 

-동해 한가운데에 유파산이 있는 데, 바다로부터 7,000리나 들어가 있다. 그 위에 소같이 생긴 짐승이

 있는 데 푸른 몸빛에 뿔이 없고 외발이다.이 짐승이 물속으로 드나들 때면 반드시 비바람이 일며

 그 빛이 해와 달과 같고, 그 소리는 우뢰와 같다. 이름을 기夔라고 한다. 황제가 이것을 잡아 그

 가죽으로 북을 만들고, 뇌수의 뼈를 두들기니 그 소리가 500리 밖까지 들려 천하를 놀라게 했다.

 (東海中 有流波山, 入海七千里, 其上有獸, 狀如牛, 蒼身而무角, 一足, 出入水則必風雨, 其光如日月,

 其聲如雷, 其名曰夔, 黃帝得之, 以其皮爲鼓, 궐以雷獸之骨, 聲聞五百里, 以威天下)<산해경(山海經-

 대황동경_大荒東經)> 

 

*12 부상과 사화沙華/흑치黑齒와 마라麻羅 : 동해 가운 데 있는 나라와 남만의 종족이름. 부상은

                해돋는 곳인데 일본의 별칭,사화는 동해에 있는 나라로 미지의 나라인데, 발음상 사할린과

                유사하고 아무르강 하류 타타르해협의 나라, 또.흑치마라黑齒麻羅는 검은 이빨의 흑치국과

                마라국인데 마라국은 동남아 말레이 반도의 나라들을 가 리킴. 곧 말레이시아와 인도네시아

               이다. 흑치국은 중국 남부 광서 장족자치구를 말 함. 이 지역사람들은'빈랑'이라는 열매를

               씹어 이빨이 검게 염색되어있다.

*13 상투 튼 보가家족 : "보가족은 중국 동남해에 사는 부족명으로 귀족은 머리털을 머리 뒤로 모아 묶고

                백성들은 머리를 박박 깎았다." <중국의 역사서 「삼재도회三才圖會」>

 *14 연만의 굴과 조개 : "연만은 세 종족이 있는 데, 한 종족은 어연(魚연)으로 낚시질을 잘하고, 다른 한

                종족은 호연(호연)으로 바다에 들어가 굴조개를 잘 잡고, 또 다른 한 종족은 목연(木연)으로

                나무를 베어 과일을 잘 딴다.” <중국의 역사서 「삼재도회三 才圖會」> 모두 가난하고

                미개한 부족들이다.

*15 조와爪蛙 : 조와국은 '파사국'이라고 조선말에 출판된 문헌비고는 기록했는데, 오늘날 파키스탄에서

               이라크에 이르는 지역을 말한다.

 *16 불제佛齊 : 불제국은 '그 나라에서 소를 신성시한다'고 했고,그 위치가 진랍眞臘과 파사의 사이에 있다.곧 인도를 가르킨다.

 

 

 3)대한평수토찬비大韓平水土贊碑

 

 대한평수토찬비문大韓平水土贊碑文  역시 삼척 부사  미수허목眉叟許穆이 짓고 쓴 것이다. 그가 백이숙제의 나라 죽국竹國에 사신으로 갔을 때, 죽국에서 3,700년만에 지하에서 발굴된 하우夏禹의 「형산비衡山碑」가 있는 것을 알아내어, 그 글씨체로 중국 형산비衡山碑의 대우수전大禹手篆 77자 가운데 48자를 가려서 새긴 것이라 전하고 있다.   내용은 임금의 은총과 수령으로서 자신의 치적을 기린 글이다.

현종 원년(1661) 목판에 새기어 읍사邑司에 보관되어 오다가 240여년 후인 광무 8년(1904) 칙사勅使 강홍대와 삼척군수 정운철 등이 왕명에 의해 석각하여 죽관도에 건립하였다. 비의 높이는 145cm, 폭 72cm, 두께 22cm이며, 비각의 전 면에 「우전각禹篆閣」제액이 게판되어 있다.      

                  

  

                                                        대한평수토찬비의 비각인 우전각(禹篆閣)

 

    

                                                                              대한평수토찬비의 48자(字)복사본

                                                                                                                                                 

 

  대한평수토찬비의 48자를 보면 문자라기보다 마치 동물원의 동물들을 보고, 그 느낌을 표현해 놓은 것 같게 보인다.그도  중국의 기서奇書로 알려진 『산해경山海經』에나 나오는 짐승들의 형상과 유사하다. 하기야 상형문자의 바탕인 금석문자가 그러했으니 일리도 있다고 하겠다.

분명 허목의 척주동해비에 등장하는 짐승들을 보면, 그도 산해경에 나오는 짐승들에 흥미를 느꼈을지도 모르는 일이다.시대 사람들이 남긴 문집들에서 그가 괴이한 것에 관심이 많았다고 전언하고 있기때문이다.

 

                           久旅忘家翼輔承帝

                      勞心營知衰事與制

                      泰華之定池瀆其平

                      處水奔麓魚獸發形

                      而岡弗亨伸盃疏塞

                      明門輿庭永食萬國

 

                           집을 떠난지 오랜동안

                           임금의 뜻을 받들어서

                           온갖 지혜 다 짜네

                           열심히 일하고 규범을 만들었더니

                           땅이 안정되고

                           물이 고요해져서

                           물에도 땅에도

                           어수가 제 모습을 나타내니

                           형통하게 되었고

                           비색함이 없어져

                           밝은 사회 이룩되어

                           영원토록 잘 살리
  

 
 삼척부사  미수허목眉叟許穆
  허목(1595~1682)이 삼척부사로 근무한 때는 1660년(현종 1) 10월부터 2년 남짓한 기간이었다. 그는 56세에 정릉참봉이라는 말직으로 벼슬길을 시작했고, 63세에는 산림山林 출신으로 사헌부 지평이 되었다.1659년 효종이 사망하자 모친인 자의대부의 복상 기간을 두고 예송이 있었는데, 허목은 일년복을 주장하는 송시열에 맞서 삼년복을 주장하다가 삼척부사로 좌천되었다.

 

삼척으로 부임할 때 허목은 나이는 66세, 인생의 황혼기로 접어들고 있었다. 삼척은 백두대간이 동해와 맞닿은 곳에 위치한 동쪽 끝의 고을이었다. 원래 이곳에는 실직국悉直國이 있었는 데, 파사왕 때 신라에 투항했고, 지증왕 때 이사부가 이곳 군주로 있다가 하슬라주 군주가 되어 우산국(울릉도)을 평정했다.

 

조선시대에 삼척은 왕실의 주목을 받았는 데, 태조 이성계의 4대조인 목조穆祖의 외가이자 목조가 거처했던 곳이기 때문이다. 이곳에 부사로 부임한 허목은 매우 다양한 활동을 펼쳤다. 삼척 사람들은 검소하고 질박하지만 비非유교식 제사인 음사淫祀를 좋아하는 풍습이 있었다. 이에 허목은 유교식 예제를 보급하는 일에 진력했는 데, 각 고을에 향약을 보급하고, 이사里社를 설치하여 풍년을 비는 제례를 올렸으며, 제례를 마치면 고을의 연장자들이 모여 향음주례를 거행하게 했다.

 

허목은 삼척의 명승지를 돌아보고 중요한 건물을 증축했다. 그는 대표적 명승지인 죽서루竹西樓에 올라가 멋진 경치를 감상하고, 현판 글씨를 남겼다. 죽서루 옆에는 서별당이란 관아 건물이 있었는 데 오랫동안 돌보지 않아 퇴락해 있었다. 허목은 이 건물을 중수하고 기문記文을 지었다. 허목은 두타산을 유람한 「두타산기頭陀山記」를 남겼는 데, 삼화사, 호암, 반학대, 중대사, 학소대, 석봉을 거치는 경로였다. 삼척부 읍치에는 광해군 때 삼척부사로 왔던 김효경의 공적을 기리는 사당이 있었는데, 역시 퇴락해 있었다. 허목은 이 건물을 옮겨 짓고 제사를 지냈으며, 이를 기록한 기문을 지었다.

 

동해에는 바람이 많고 파도가 심했는 데, 특히 장마철이 되면 강 하구가 막히고 오십천이 범람하여 백성들에게 막대한 피해를 입혔다. 허목은 해일 피해를 막기 위해 바닷가에 우임금의 전서체로 쓴 비석을 세웠는 데, 이것이 바로 척주동해비陟州東海碑이다. 이 비석은 허목의 글씨가 일품인 데다 도가와 주술적인 비유들이 들어있어 매우 특이하면서도 기괴하다. 척주동해비의 탁본은 물과 불이 침범하지 않는 효과가 있다고 하여 부적처럼 사용되었는 데, 이 비의 탁본은 지금까지도 유행하고 있다.

삼척 미로리未老里에는 예전부터 목조 부모의 묘소가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동국여지승람』의 기록에 근거한 것인데, 목조 부친의 묘소는 읍치 서쪽으로 45리 떨어진 노동에, 모친의 묘소는 30리 떨어진 동산에 있다고 했다. 조선 왕실에서는 선대의 묘소를 찾아 수호하려는 노력을 계속했지만, 선조 때까지 묘소의 위치를 확정하지 못했다. 1662년에 허목은 이를 고증하는 「노동이묘기蘆東二墓記」를 작성했는 데, 목조가 살았던 옛 집터와 텃밭이 발견되었으므로 그 인근에 있는 두 묘소가 진짜일 가능성이 크다는 입장이었다. 허목의 기록은 1899년에 고종 황제가 삼척에 준경묘濬慶墓와 영경묘永慶墓를 조성하는 중요한 근거가 되었다.

허목의 업적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은 삼척 지역의 지리지인 『척주지陟州誌』 2권을 편찬한 것이다. 허목은 관아에서 근무하는 틈틈이 고을의 노인들을 찾아서 예전부터 전해지는 이야기를 들었고, 관아의 서리들이 보관하던 고문서와 『동국여지승람』 등의 기록을 대조하면서 관련 자료들을 정리했다. 허목은 자신이 현지에서 활동한 사항도 상세히 기록했는 데, 위에서 언급한 행적은 모두 이에 근거한 것이다.

허목이 삼척으로 간 것은 중앙 정계에서 밀려나 지방으로 좌천되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삼척으로 좌천될 당시 그는 66세의 노인이었으므로, 실망과 한숨으로 시간을 보낼 수도 있었다. 그러나 허목이 삼척에서 이룩한 업적은 매우 다양하면서도 의미가 있었다.  갖은 악조건에도 자신의 일에 최선을 다하고 끝내 유의미한 성과를 거둬들이는 허목의 행적에서 ‘실학자’로서의 풍모를 발견하게 된다.  


                       참고자료 : 『三陟市誌』삼척시 1997,
悉直文化제3집 삼척문화원 1992,

                                      「삼척부사 허목」김문식 단국대 사학과교수

 

출처 : 강석정의 사랑방
글쓴이 : 보중 원글보기
메모 :

'현대시.한시.' 카테고리의 다른 글

[스크랩] 낙관에 대하여  (0) 2014.05.23
[스크랩] 가훈모음  (0) 2014.05.23
대한평수토찬비[미수 허목]  (0) 2014.05.22
눈 [雪] /김삿갓  (0) 2014.05.08
금강산/김삿갓  (0) 2014.05.0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