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의 선비정신
은둔과 참여는 하나다 南冥(남명:曺植 조식)과 敬(경)
남명은 선조에게 정치를 ‘솜씨가 아닌 몸으로 할 것’을 요구하였다.
정치를 ‘몸으로 한다’는 것은 과연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
여기서 남명은 경(敬)을 말한다
崔鎭弘
남명 조식. |
1980년대 초반, 스무 살을 갓 넘겼던 필자는 산을 무척 좋아했다. 특히 지리산(智異山)을 좋아해서 계절마다 찾았다. 그러나 그렇게 지리산을 다녔어도 그때는 남명(南冥)을 몰랐다. 당시에 필자가 지리산에서 느끼는 감정은 주로 민족의 분단문제를 다룬 이병주(李炳注·1921~1992년)의 《지리산》이란 소설과 연결되어 있었다. 《남부군》이란 책은 나오기 이전이었으니까.
세월이 흘렀다.
참으로 오랜만에 다시 지리산을 찾았다. 하지만 이번 산행(山行)은 남명 조식(南冥 曺植·1501~1572년)의 길을 찾아나선 도행(道行)을 목적으로 한 발걸음이었다. 필자는 《율곡》(栗谷)을 읽으면서 수많은 인물을 만날 수 있었다. 그 인물들 가운데 반드시 다시 찾을 것을 기약했던 인물이 바로 남명이었다.
산천재(山天齋)! ‘산천(山天)’이란 《주역》(周易) 64괘(卦) 중 26번째 괘인 ‘대축괘(大蓄卦)’의 괘명(卦名)이다. 그 괘의 모습을 보면 위에 산이 있고 아래에 하늘이 있는 형상으로 하늘이 산 속에 있는 상이다. 군자(君子)가 이를 본받아서 하늘의 이치가 내 손에 있음을 알아서 학식과 덕행을 쌓는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높이 치솟은 지리산 천왕봉(天王峰) 아래 위치한 산천재는 남명이 만년(晩年)을 보낸 곳이다. 국가문화재 사적 제305호로 지정된 사적지 안에는 남명이 당시 문도(門徒)들을 가르치던 산천재와 남명의 묘소, 위패를 모신 여재실(如在室), 선생의 학덕(學德)을 기리기 위해 세운 신도비(神道碑) 등이 있으며, 이곳에서 약 1.5km 떨어진 곳에는 그를 봉향한 덕천서원(德川書院)이 있다.
2011년 2월 24일 필자가 찾은 산천재는 아늑했다. 산천재에서 필자를 먼저 맞은 것은 ‘남명매(梅)’라고 불리는 오래된 매화나무였다. 남명매는 이제 막 움을 틔우고 있었다.
천도(天道)란 이런 것이 아닐까. 끝나지 않을 것 같던 매서운 겨울 추위가 계절의 순환 앞에선 하나의 놀이에 불과한 것이란 것을 깨닫는 것이 바로 천도라고 말하면 공부가 깊은 어른들께 혼이 날 수도 있겠지만 남명매 앞에서 필자는 천도란 바로 이런 것일 거라고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산천재에서 바라보는 천왕봉은 과연 어떤 모습일까? 서울에서 버스를 타고 가는 내내 궁금했다. 남명매를 바라보던 시선을 조금 들어 서북쪽을 향하니 바로 천왕봉이 손에 잡힐 듯이 마주하고 있었다. 산천재를 지으면서 덕산으로 이주하여 하늘에 맞닿아 있는 천왕봉을 바라보는 남명의 마음에는 하늘의 도(天道)가 자리하고 있지 않았을까. 천도란 그 자리에 있는 것이다. 계절이 되면 남명매는 꽃을 피운다. 그것이 천도이다.
하지만 그 꽃을 보면서 향기를 팔지 않을 것을 다짐하며, 하늘 위로 솟아 있는 천왕봉을 보며 자신의 마음이 흔들리지 않기를 다짐하는 것은 우리 인간의 길, 곧 인도(人道)가 아닐까.
물그릇 받쳐들고 밤을 새워
이제 남명매와 천왕봉을 가슴에 담고 남명의 삶을 찾아가 보자. 남명은 1501년 6월 경남 합천군 삼가면 토동(兎洞) 외가에서 태어났다. 다섯 살 때까지 외가에서 자라던 남명은 아버지 조언형(曺彦亨)이 장원급제하여 벼슬길에 오르자 한양으로 이사해 아버지에게 문자를 배웠다. 소년 시기에는 후에 영의정으로 활동한 이준경(李浚慶·1499~1572년) 형제 등과 죽마고우로 자라면서 학업을 닦았다. 아버지가 외직(外職)인 단천(端川)군수로 나가자 거기서 함께 지내면서 남아(男兒)가 익혀야 할 지식과 재능을 익혔고, 특히 자신의 정신력을 기르느라 두 손에 물그릇을 받쳐들고 밤을 새우기도 하였다.
시시각각 변하는 우리네 마음을 다잡는 일은 쟁반 위의 물을 흘리지 않고 받쳐들기만큼이나 어려운 일이다. 이렇게 혹독한 자기 수양을 하던 남명은 18세에 한양으로 돌아와 우계 성혼(牛溪 成渾·1535~1598년)의 아버지인 청송 성수침(聽松 成守琛·1493~1564년)을 만나 그의 고결한 인격을 접하였고 그로 인해 인생의 큰 변화를 겪게 됐다. 이후 남명은 보다 높고 깊은 인생의 경지를 추구하기 시작했다.
유교(儒敎)경전 외에도 노장학(老莊學)과 불교서적을 섭렵했다. 남명은 20세에 생원·진사 양시(兩試)에 급제했으나 기묘사화(己卯士禍)로 조광조(趙光祖)가 죽고, 자신의 숙부인 조언경(曺彦卿)이 멸문(滅門)의 화(禍)를 입게 되자 벼슬을 단념한다.
그러던 중 25세에 《성리대전》(性理大全)을 읽다가 원(元)나라 허형(許衡·1209~1281)의 “이윤(伊尹)의 뜻을 두고 안자(顔子)의 학문을 배워, 벼슬길에 나아가면 큰일을 해내고, 초야(草野)에 숨어 살면 자신을 지키는 것이 있어야 한다”는 말에 크게 깨닫는다. 이를 계기로 뜻은 이윤에게 두고 공부는 안회(顔回)에게 초점을 맞추겠다고 다짐하게 된다.
이윤과 안회를 본받아
남명이 말년을 보내면서 제자들을 길러낸 산천재. |
이윤은 누구인가.
이윤은 하(夏)나라를 멸하고 상(商)왕조를 성립할 때 큰 역할을 하였으며, 이후 아형(阿衡)으로서 탕왕(湯王)을 보좌해 수백 년 동안 이어지는 상왕조의 기초를 굳힌 인물이다.
탕왕이 죽고 그의 손자 태갑(太甲)이 즉위했는데, 태갑은 방탕한 생활을 해 국정을 어지럽혔다. 그러자 이윤은 태갑을 동(桐) 땅으로 추방했고 섭정으로서 태갑을 대신했다. 동 땅은 탕왕의 무덤이 있는 곳이었다. 할아버지 무덤 옆에서 3년을 보낸 태갑은 마침내 회개한다.
이를 확인한 이윤은 그를 다시 왕으로 맞이하고 자신은 신하로 되돌아간 세계 역사상 유례가 없는 인물이다.
그렇다면 안회는 누구인가.
공자의 제자 안회는 가난하지만 학문을 좋아하는 사람으로 워낙 학문을 좋아하여 나이 29세에 벌써 백발이 되었다. 자공(子貢)이 “하나를 들으면 열을 안다(聞一知十)”며 자신과는 비교할 수 없다고 말한 사람이 바로 안회이다. 안회는 찢어지게 가난했으나 그 가난은 그의 수행과 학문 연구에 아무런 영향도 줄 수 없었다.
안회는 ‘한 소쿠리의 밥과 한 표주박의 물(一簞食一瓢飮)’을 가지고도 즐거움을 잃지 않는, 공자가 가장 사랑한 제자였다.
이후 남명은 이윤의 길과 안회의 길 사이를 줄다리기하는 삶을 살게 된다. 탕임금을 도와 지치(至治)를 이룩한 이윤과 같은 포부를 가지고 있었지만, 그런 포부를 펼 수 없는 세상에서는 안회처럼 도(道)를 구하겠다는 결심을 하였다.
30세에 처가가 있는 김해로 이사하여 거기에 산해정(山海亭)을 짓고 공부에 전념하였고, 48세에는 다시 고향 합천으로 돌아와 계부당(鷄伏堂)과 뇌룡정(雷龍亭)을 짓고 후진을 가르친다.
1555년 을묘왜변(乙卯倭變)이 일어났다. 뒤숭숭한 민심을 달래기 위해서 조정에서는 남명을 필요로 했다. 당시의 실권은 문정왕후(文定王后)와 윤원형(尹元衡)이 쥐고 있었다. 이들은 남명을 단성(丹城)현감에 임명했다. 이때 남명의 반응은 유명한 <을묘사직소>(乙卯辭職疏)에 잘 나타나 있다.
이 상소에서 남명은 문정왕후를 ‘궁중의 한 과부’로, 명종(明宗)을 ‘선왕의 고아(孤兒)’로 불러버렸다.
한편 이 시기에 오건(吳建·1521~1574년), 정인홍(鄭仁弘·1535~1623년) 등 많은 제자가 와서 배웠다. 앞에서 본 이윤과 안회의 길을 함께 가겠다는 남명 자신의 결심을 구현하기 위해서 계부당과 뇌룡정이란 건물을 지은 것이다.
‘계부’란 ‘닭이 알을 품는다’는 의미로 함양(涵養)하는 공부와 후진 양성을 의미하는 것이고, ‘뇌룡’이란 ‘연못처럼 고요하지만 때로는 용의 꿈틀거림처럼 뇌성(雷聲)을 발한다’는 뜻이다. 계부당에서 후진을 가르치며 안회를 생각하고, 뇌룡정에서 죽음을 무릅쓰고 상소를 올리면서 이윤을 떠올렸던 것이다.
敬義劍
뇌룡정. |
남명은 회갑이 되는 61세에 또다시 거처를 옮긴다. 크게 버리면 크게 얻는다고 했던가.
남명은 동생 환(桓)에게 고향의 모든 가산(家産)을 물려주고 이곳 덕산 땅에 터를 잡고 산천재를 지었다.
이전에 이미 십여 차례 지리산 이곳저곳을 유람했던 남명이었다. 오랜 숙고 끝에 선택한 덕산 땅은 마치 산이 마을을 반지처럼 동그랗게 감싸주는 곳이었다. 모든 것을 놓아둔 채 이곳을 선택한 남명은 자신의 심정을 다음과 같은 시(詩)로 표현했다.
<봄 산 어딘들 향기로운 풀 없으랴만
하늘 닿은 천왕봉이 마음에 들어서라네
빈손으로 들어왔으니 무얼 먹고 견뎌낼까?
십리 은하수 같은 물, 먹고도 남으리.>
春山底處無芳草
只愛天王近帝居
白手歸來何物食
銀河十里喫猶餘
그런데 여기서 필자는 갑자기 남명이 계속 거처를 옮긴 이유가 궁금해졌다. 당시에 집을 새로 짓고 새롭게 삶을 시작한다는 것이 그렇게 쉽지는 않은 일이었을 것임을 짐작하기란 어렵지 않다. 이때 필자의 눈에 들어온 물건이 남명기념관에 있는 성성자(惺惺子)라는 방울과 경의검(敬義劍)으로 불리는 장도(粧刀)였다.
‘성(惺)’이라는 글자는 ‘깨달음’을 뜻한다.
남명은 항상 이 방울을 몸에 지니고 생활하면서 방울 소리를 들을 때마다 자신을 일깨우고자 하였다.
경의검에는 ‘마음을 밝히는 것은 경(內明者敬)이고, 밖의 일을 처단하는 것은 의(外斷者義)’라고 새겨져 있었다. 성성자와 경의검을 보면서 필자는 추측해 보았다. 남명의 이사(移徙)는 한곳에 머물러 있으면 빠지기 쉬운 자신의 나태함을 이겨내기 위한 몸부림이 아니었을까?
1565년 문정왕후가 죽자 새로운 정치를 갈망하는 욕구가 강하게 일어났다. 1566년 남명은 자신의 생애에서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임금을 만난다. 그런데 이때 남명은 관복(官服)이 아닌 포의(布衣)를 입은 채로 명종을 독대(獨對)하여 치국(治國)의 방략(方略)과 학문의 요체를 말했다. 하지만 남명은 ‘고아’가 아니기를 바라고 길을 떠나 만난 명종이 ‘고아’라는 사실만을 확인하고 다시 돌아온다.
胥吏亡國論
경의검. |
1567년 명종의 뒤를 이어 등극한 선조(宣祖)는 여러 번 남명을 부른다. 하지만 남명은 나가지 않고 상소를 통해 자신의 주장을 말했다.
당시의 분위기는 남명이 출사(出仕)를 하느냐 마느냐를 가지고 국가의 명운(命運)을 점칠 정도였다.
남명은 선조의 간곡한 부름에 ‘구급(救急)’이라는 두 글자를 올린다. 비상시국이란 뜻이다.
왜 비상시국인가?
당시의 위정자(爲政者)들은 나라의 근본인 백성들의 삶은 버려둔 채, 이름을 알리는 것만 대단한 줄로 여기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는 마치 ‘그림의 떡이 배고픔을 구하지 못하는 것과 같은’ 이치였다.
남명이 본 당시의 상황은 정치 자체가 실종된 상태였다. 임금과 신하 모두 정치에서 손을 떼고 있었다. 그렇다면 정치는 누가 담당하고 있었을까?
여기서 남명은 유명한 ‘서리망국론(胥吏亡國論)’을 주장했다.
나라의 모든 사무를 밑에 있는 아전(衙前)들이 처리하고 있었다. 남명의 말을 들어보자.
<예부터 권신(權臣)으로서 나라를 마음대로 했던 일이 있기도 하였고, 외척(外戚)으로서 나라를 마음대로 했던 일이 있기도 하였으며, 부녀자와 환관(宦官)으로서 나라를 마음대로 했던 일이 있기도 하였으나 지금처럼 서리(胥吏·아전)가 나라 일을 마음대로 했던 일이 있었다는 것은 듣지 못했습니다. …
모든 정사와 국가 기밀이 모두 서리의 손에서 나오므로, 포목과 곡식을 관청에 바치는 데에도 뒷길로 웃돈을 바치지 않으면 되지 아니합니다. 안으로 재물이 모이면 백성은 밖으로 흩어져, 열 명 가운데 한 명도 남아 있지 않을 것입니다. 심지어는 각자 ‘자신이’ 맡고 있는 고을을 자기 물건처럼 생각하여, 문서를 만들어서 교활하게 자기의 자손 대대로 전합니다.
지방에서 바치는 것을 일체 가로막고 물리쳐서 한 물건도 상납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공물(貢物)을 가지고 바치러 갔던 자가 온 가족의 가산을 다 팔아서 바쳐도 그것이 관청으로 들어가지 않고 아전 개인에게로 돌아갑니다. 백배가 아니면 받지를 않습니다. …
서리가 도둑이 되고 온갖 관리가 한 무리가 되어 심장부를 차지하고 앉아 국맥(國脈)을 모두 결딴내(는데도), 법관이 감히 묻지도 못하고 사구(司寇·형조판서)도 감히 따지지 못합니다.>
이것이 바로 남명이 선조에게 지적한 서리망국론의 내용이다. 하지만 당시엔 아무도 이 문제를 심각하게 인식하지 않았다. 왜? 그들에게는 정치란 하찮은 것이었고, 지식인들의 책무는 고차원적인 상달(上達)의 세계에서 머물러야 했기 때문이었다. 남명은 형이상학적 문제에만 몰두해 이론적인 탐구만 일삼는 풍조를 비판했다.
정치를 몸으로 하라
남명은 젊은 사람들이 《소학》(小學)의 ‘쇄소응대진퇴지절’(灑掃應對進退之節;《소학》 서문에 나오는 말로, ‘물 뿌리고 쓸고 어른이 부르면 응하고 대답하며 나가고 물러나는 예절’이라는 의미)도 모르면서 함부로 하늘의 이치(천리·天理)를 말한다고 당시의 학풍을 지적했다.
‘아래로 사람의 일(人事)을 먼저 배우고, 그다음 위로 천리에 통달해야 한다’(下學人事 上達天理)는 것이 남명의 주장이었다. 다시 말하면 가까운 일상생활부터 차례차례 배워 올라가야 한다는 것이었다.
공자가 현실 정치에서 성공을 하지 못한 이후로, 정치 현장보다는 그 정신적인 측면이 소중하다는 인식이 생겨났다. 그런데 문제는 실제 일은 속된 것이고 그 정신적인 측면만이 가치가 있는 것으로 여길 때 발생한다. 실제 일이 아닌 이론의 차원에만 초점이 모일 때의 문제점을 남명은 정확하게 인식하였다. 하지만 실제 일에 대해 남명이 제시한 처방책의 실효성 여부는 다시 따져보아야 할 주제이다.
남명은 선조에게 “천하의 일이 비록 극도로 어지럽고 극도로 잘 다스려지더라도 모두 사람이 만드는 것이지, 다른 데서 말미암은 것은 아니다”고 말했다. 치란(治亂)이 모두 사람 하기에 달려 있다는 의미이다. 어떻게 해야 하나.
남명은 선조에게 정치를 ‘솜씨가 아닌 몸으로 할 것’을 요구하였다. 정치를 ‘몸으로 한다’는 것은 과연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 여기서 남명은 경(敬)을 말한다.
<가슴 속에 마음을 보전해서 혼자 있을 때를 삼가는 것이 큰 덕(大德)이고, 밖으로 살펴서 그 행동에 힘쓰는 것이 왕도(王道)입니다. 가슴 속에 본심을 보존하고 밖으로는 자신의 행동을 살피는 가장 큰 공부는 반드시 경(敬)을 위주로 해야 합니다. 이른바 경이란 것은 정제하고 엄숙히 하여, 항상 마음을 깨우쳐서 어둡지 않게 하는 것입니다.
한마음의 주인이 되어 만사에 응하는 것은, 안은 곧게 밖은 방정하게 하는 것입니다. 공자의 ‘경으로써 몸을 닦는다’는 것이 이것입니다. 그러므로 경을 주로 하지 않으면 이 마음을 보존할 수 없고, 마음을 보존하지 못하면 천하 이치를 궁구할 수 없으며, 이치를 궁구하지 못하면 사물의 변화를 다스릴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이 상소문에는 ‘서리망국론’보다도 필자의 눈을 강하게 사로잡는 것이 있었다. 바로 상소문의 심상(尋常)치 않은 출발점이다. 이 상소문은 ‘진주 사는 백성(晋州居民) 조식은 올린다’로 시작한다.
진주거민!!! 남명은 선조에게 ‘당신의 신하이기에 앞서 이 나라의 백성’이라고 말하고 있었다. 이 나라의 주인은 바로 백성이다. 선조를 시험해 본 것이다. 백성을 모르면 임금 노릇을 할 수 없기 때문이었다.
남명은 자신을 선조의 신하가 아닌 이 나라의 백성으로 인식하고자 하였다. 그야말로 작정하고 올린 것이다. 오늘날 아랍세계의 민주화물결이 거세게 일고 있다. 이라크의 무바라크 정권이 무너졌고, 리비아 카다피 정권이 흔들리고 있다. 누가 무너뜨렸나? 바로 백성이다. 이 점을 이미 근 500년 전에 남명은 인식했고, 또 지적하였다.
백성들은 위험하지 않다
남명은 <민암부>(民巖賦)에서 백성을 물에 비유하고 임금을 배에 비유하여, 물이 노하면 배를 전복시킬 수도 있음을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백성이 물과 같다는 말은,
예부터 있어 왔으니,
백성은 임금을 받들기도 하지만,
백성은 나라를 엎어버리기도 한다.
걸·주(桀·紂)가 탕·무(湯·武)에게 망한 것이 아니라,
바로 백성에게 신임을 받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백성들이 위험하다 말하지 마라
백성들은 위험하지 않다.>
백성이 나라를 엎어버리는 행위는 위험한 것으로 인식할 사안이 아니다. 당연한 것으로 인식해야 할 사안이다. 내년이면 우리는 선거를 치른다. 당장 올 봄에도 보궐선거가 몇 군데 예정되어 있다. 공직에 나가는 사람들의 자세에서 <민암부>의 경고를 한 번이라도 느낄 수 있다면 우리의 현대사(現代史)는 희망이 보인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에게 그 느낌을 주는 인물이 분명히 있기를 우리 모두 기대해 보자.
72세가 되던 해(1572), 2월 8일 남명은 산천재에서 조용히 서거(逝去)했다. 서거 전에 문병 온 제자들에게 자신의 사후 칭호를 처사(處士)로 할 것과 자신의 학문은 경(敬)과 의(義) 두 글자로 집약되는데, 이는 하늘의 해와 달과 같은 것으로 변할 수 없는 진리이니 힘써 지켜나갈 것을 당부했다.
남명의 삶에서 은둔과 참여라는 두 개의 화두(話頭)가 지식인의 삶이라는 측면과 맞물려 있음을 배웠다. 현실에 빠지지도 않으면서 세상을 잊지도 않는 정치평론가의 모습이다. 둘 사이에서 균형 잡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여기서 자칫 잘못하면, 아니 대부분은 기회주의자가 되기 마련이다.
기회주의자가 되지 않으려는 몸부림이 바로 경과 의이다. 이윤과 같이 한 발을 정치 일선에 담고 있으면서, 또 다른 한 발은 안회와 같이 빼고 있는 모습이 바로 남명의 자세였다.
남명의 경은 의와 동거할 때 의미를 가진다. 결국 남명이 관복이 아닌 포의를 입고, 진주에 사는 백성이라고 칭한 것은 다 중요한 정치적 의미를 지닌다. 정치에 대한 무조건적인 혐오가 아니라 여건이 조성되지 않은 상태에서 이름만 빌려주는 들러리가 되지 않겠다는 의미이다. 이름만을 빌려주기를 원하는 작태는 예나 지금이나 계속되고 있는 정치판의 모습 아닌가. 그렇다고 정치 자체를 외면하는 지식인들만 존재한다면 그 사회는 이미 생명력(生命力)이 다한 것 아닌가.
在野와 在朝는 동전의 앞뒷면
남명에게 재야(在野)와 재조(在朝)는 결코 만날 수 없는 평행선이 아니었다. 동전의 양면과 다름없는 것이었다. 마치 경과 의가 해와 달과 같은 관계이듯이. 여기서 이윤과 안회의 길은 사실 서로 역시 상반된 길이 아니다. 그런데 인간들은 흔히 이 길을 서로 상반된 길로 여기고 있다. 서로 다른 길로 여기므로 자기와 다른 길을 가는 사람은 이단(異端)이고 소인(小人)이 되고 만다. 하지만 남명에게 이윤과 안회는 모두 같은 맥락에서 통하는 인물들이었다.
산천재를 떠나면서 다시 한 번 천왕봉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산천재에 남아 있는 남명의 또 다른 시 한 편을 음미하며 이 글을 마친다.
<천섬 들어가는 큰 종을 보소서!
크게 치지 않으면 소리가 없다오.
어떻게 하면 저 두류산처럼
하늘이 울어도 울지 않을까?>
請看千石鐘
非大?(구)無聲
爭似頭流山
天鳴猶不鳴⊙
崔鎭弘
⊙ 1963년생.
⊙ 고려대 정치외교학과 졸업. 서울대 정치학 박사.
⊙ 현 서울대 한국정치연구소 선임연구원.
⊙ 저서 : 《법과 소통의 정치》.
<남명매와 산천재>
산 고개를 넘어 시천면으로 달리다 보면 덕천강변과 잘 어울리는 남명 조식(南冥 曺植, 1501년 6월 26일 ~ 1572년)선생이 61세 이후 이곳 지리산 자락인 시천면 사리(絲里)에 와서 신선이 되고자 하였던 ‘산천재(山天齋)’와 그 뒤편 산 위에는 선생이 살아생전 자신의 묘소로 잡아두었다는 남명선생의 묘가 보인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산천재에 잠시 들러 산청삼매중 하나인 남명매(南冥梅)와 산천재의 모습을 담아 보았다. 남명매 앞에는 예전에 없던 싯구가 있어 옮겨본다.
우금(偶吟) 우연히 읊다
주점소매하(朱點小梅下) 작은 매화 아래서 책에 붉은 점찍다가
고성독제요(高聲讀帝堯) 큰 소리로 요전을 읽는다.
창명성두근(窓明星斗近) 북두성이 낮아지니 창이 밝고
강활수운요(江闊水雲遙) 강물 넓은데 아련히 구름 떠 있네.
그리고 산천재(山天齋) 기둥에는 다음과 같은 주련이 걸려 있어 가난하지만 비굴하지 않는 남명선생의 사상을 느낄 수 있다.
춘산저처무방초 (春山底處無芳草) 봄산 어느 곳엔들 향기로운 풀 없으리오.
지애천왕근제거 (只愛天王近帝居) 천왕봉이 옥황상제와 가까이 있는 것을 사랑해서라네.
백수귀래하물식 (白手歸來何物食) 빈손으로 돌아와 무얼 먹을 건가
은하십리끽유여 (銀河十里喫有餘) 은하수 같은 맑은 물 십리에 흐르니 먹고도 남겠네.
또한 산천재 입구에는 이런 싯구가 적혀 있어 남명선생이 벼슬길에 나가지 않겠다는 의지를 알게 한다.
청간천석종(請看千石鐘) 청컨데, 천석들이 종을 보시게
비대구무성(非大?無聲) 북채 크지 않으면 쳐도 소리 없다네
쟁사두류산(爭似頭流山) 어찌하면 저 두류산처럼 될까
천명유불명(天鳴猶不鳴) 하늘이 울어도 오히려 울지 않는다.
출처 :http://blog.daum.net/win690
請看千石鐘
非大?(구)無聲
爭似頭流山 (萬古天王峰 ??)
天鳴猶不鳴
非大?無聲
크게 치지 않으면 소리가 없다오.
북채 크지 않으면 쳐도 소리 없다네.
어느해석이 맞는가요?^^
金剛般若波羅密經五家解序說
外應群機
(說誼 ; 物來卽應하야 感而遂通이 如明鏡이 當臺에
胡來胡現하고 漢來漢現하며
洪鍾이 在?에 大?大鳴하고 小?小鳴이니라)
사물이 오면 곧 응하여 느껴서 통하는 것이 마치 밝은 거울이 대에 딱 맞게 얹혀져
胡人(호나라 사람)이 오면 胡人이 비치고 漢人이 오면 한인이 비치는 것과 같으며
큰 종이 틀에 걸려 있어서 크게 치면 크게 울리고 작게 치면 작게 울림과 같음이라.
千石鐘 과 洪鐘이
天鳴猶不鳴 과 大?大鳴이 어울립니다^^
<크게 치지 않으면 소리가 없다오.>란 해석이 어울립니다..
남명 선생님이 아마 당시에 왕과 소통이 잘 안되었던 것 같습니다.
'현대시.한시.' 카테고리의 다른 글
[스크랩] 한시모음? (0) | 2014.02.19 |
---|---|
[스크랩] 400년간 감춰진 조선 최대 용그림 (0) | 2014.02.05 |
안중근[ 敬天].김굉필[로방송] (0) | 2014.02.03 |
[스크랩] 덕불고필유린 (0) | 2014.01.27 |
[스크랩] 수산복해 장락만년 (0) | 2014.01.2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