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문연서회or종합복지관

서산대사 시외

미르뫼 2019. 4. 10. 10:04

 

 

 

 

 

 

 

 

 

 

 

1.서산대사 詩(190409)

2.승장풍파만리랑(190409)

3.서산대사 詩(190411)

4.서산대사 詩(190417)

5.캘리그리피(calligraphy)(190713)

6.나진헌

7.비익연리(191106)

8.비익연리(191106)

9.이백의송맹호연지광릉

10. 李白의送孟浩然之廣陵

11.왕발의 등왕각(王勃의등王閣).♧金海鐘書


          등왕각((縢王閣)

 

                                                  왕발(王勃.650~676)

 

滕王高閣臨江渚(등왕고각임강저)  등왕이 세운 높은 누각 감강 기슭에 있는데

 

佩玉鳴鑾罷歌舞(패옥명란파가무)  패옥 소리, 방울 소리 가무도 사라졌다.

 

畫棟朝飛南浦雲(화동조비남포운아침에는 아름답게 칠한 용마루에 남포의 구름이 날고

 

朱簾暮捲西山雨(주렴모권서산우저녁에는 주렴에 서산의 비가 걷힌다.

 

閑雲潭影日悠悠(한운담영일유유한가로운 구름과 강물에 비친 그림자 날마다 유유한데

 

物換星移幾度秋(물환성이기도추사물이 바뀌고 세월이 흐른 지 몇 해던가?

 

閣中帝子今何在(각중제자금하재누각에 있던 왕자는 지금 어디 있는가?

 

檻外長江空自流(함외장강공자류난간 밖의 양자강만이 부질없이 흐른다.

 

세월의 무상함이 절로 느껴지는 시다. 이 시의 <등왕각(縢王閣)>은 바로 앞에서 설명한 그 유명한 <등왕각서(縢王閣序)>의 대미(大尾)를 장식한 칠언고시이다. 이 시 하나만 놓고 보아도 뛰어난 작품이지만, 등왕각서(縢王閣序) 전체와 함께 읽으면 더욱 실감이 나고, 감동도 더할 것이다.

   

관찰력이 뛰어난 독자라면 이 시를 읽고 나서 한 가지 의문이 생길 것이다. 첫 구절에 분명히 감강(竷江)’ 기슭이라고 하더니 마지막 구절에서는 느닷없이 왜 양자강(揚子江)’이 나오느냐고 말이다. 어차피 감강이 양자강의 지류이기도 하고, 또 부질없이 흐르는 것은 비단 감강만은 아닐 것이다. 양자강도 부질없이 흐르고, 다른 많은 강도 우리네 인간들의 좁은 눈으로 보면 다 부질없이 흐르는 것이 아닌가. 그렇다고 이 시를 깎아 내리는 것은 절대 아니다. 불철주야(不撤晝夜) 쉬지 않고 흘러내리는 것이 바로 강물의 속성인 바에야 또 그렇게 군소리 없이 흐르는 강물이 고맙기도 하고, 내심으로는 부럽기도 할 것이다. 시간도 그렇게 흐르지 않는가. 유한한 것은 바로 인간이요, 무한한 것은 강물이요, 시간이다.

  

강물의 눈으로, 세월의 눈으로 인간을 쳐다보면 또 인간이 한없이 가엾고 부질없이 보일 것이다. 태어나자마자 시기와 질투와 싸움, 탐욕 속에서 부대끼다가 그리 길지도 않은 인생을 살다가 허망하게 가버리는 인간이 얼마나 부질없는 존재로 비춰질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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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발은 당나라 시인으로, 자는 자안(子安)이다. ()나라의 유학자 왕통(王通.584~617)의 손자이며, 19세에 과거에 급제하여 고종(高宗. 649~683)의 여섯째아들 패왕(沛王) 이현(李賢. 654~684)의 부()에서 일을 보았다. 당시에 여러 왕이 투계(鬪鷄) 놀이에 빠져 들자, 이를 희화(戱化)하여 영왕(英王) 이현<李顯. 후에 중종(中宗. 683~684, 705~710)>의 투계를 비난하는 격문(檄文)을 지었다. 그러자 고종이 이를 듣고 노하여 왕발을 면직(免職)시켰다. 그 뒤 괵주(虢州)의 참군(參軍)이 되었는데, 관노(官奴) 조달(曹達)을 죽인 죄로 사형이 내려져 또다시 위기를 맞았으나, 다행히 사면을 받았다. 이 사건에 연좌되어 교지(交趾)로 좌천된 아버지 왕복치(王福峙)를 만나고 돌아오던 중 남해(南海)에 빠져 익사했다. 양형(楊炯), 노조린(盧照隣), 낙빈왕(駱賓王)과 함께 초당사걸(初唐四傑)이라고 일컬어진다.

 

왕발의 문장은 기려하여 그에게 글을 청하는 자가 아주 많았고, 그 대가로 받은 금은 비단이 집안에 그득 쌓일 정도였다고 한다. 그는 마음(글을 쓰는 재주)을 짜서 옷을 해 입고, 붓으로 농사지어 먹고 살았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그는 깊이 생각하여 이리저리 재보는 체질이 아니었다. 그는 시작(詩作)에 임해서는 먼저 먹을 잔뜩 갈아놓고는, 술에 흠뻑 취하여 잠시 잠에 곯아 떨어졌다. 그리고 깨어나서는 붓을 잡아 문장을 완성하고는 한 글자도 바꾸지 않았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를 복고(腹稿)’라 불렀다. 화려하면서도 격조 있는 시풍을 지녔고, 율시(律詩)에 뛰어 났으며, 근체시(近體詩)의 성립에도 중요한 역할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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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왕각은 당고조(高祖. 재위 618~626) 이연(李淵)의 아들이자, 태종(太宗. 재위 626~649) 이세민의 동생 이원영(李元嬰)이 등왕(縢王)으로 봉해져 홍주(洪州) 도독(都督)으로 지낼 때인 659년에 이 누각을 세웠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중국 강남(江南)3대 누각은 호북성 무한(武漢)의 황학루(黃鶴樓), 호남성 악양(岳陽)의 악양루(岳陽樓), 강서성 남창의 등왕각을 꼽는다.

    

상원(上元)2(675)에 재건되었고, 홍주 도독 염백서(閻伯嶼)가 중양절을 맞아 수많은 빈객을 초대해서 연회를 크게 베풀고, 높은 곳에 올라 부()를 지어 경축했다. 또한 사위 오자장(吳子章)을 시켜 <등왕각기(縢王閣記)>의 서문을 짓도록 하여, 자신의 등왕각 중건 업적과 사위의 재주를 자랑할 참이었다. 염백서는 내빈들에게 서문을 써줄 것을 청했으나, 저간의 사정을 아는지라 모두 사양했다. 오로지 왕발만이 오지에서 온 까닭에 그 속사정을 몰랐고, 또 20대 중반의 나이라 혈기 왕성한 까닭에 사양하지 않고 그 자리에서 일필휘지(一筆揮之)하게 되었다. 이에 기분이 언짢아진 염백서는 사람을 시켜 몰래 왕발을 감시하게 하고, 왕발이 쓰는 글을 엿보게 했다.

  

첫 번째로 알리기를, <옛날에 남창군이었던 이곳은 지금은 홍도부라.>라고 했다. 염백서가 말하기를, “그저 세상 사람들이 늘상 하는 얘기일 뿐이로다.”라고 했다. 또 알리기를, <별자리로는 익성(翼星)과 진성(軫星)에 해당되며, 땅은 형산(衡山)과 여산(廬山)에 접해 있네.>라고 하자, 염백서는 이를 듣고 생각에 잠겨 읊조리기만 하고,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또 알리기를, <저녁놀은 짝 잃은 집오리와 함께 나는데, 가을 강물은 멀고도 넓은 하늘과 한 빛을 이루었네.>라고 하자, 염백서가 벌떡 일어나 말하길 이 자가 정말로 천재로세. 의당 불후(不朽)에 드리워지리라!”하고는 드디어 왕발을 연회 장소로 초청하여 마음껏 즐긴 뒤 파했다. 이때부터 등왕각은 곧 왕발의 <등왕각서(籐王閣序)>와 함께 천하에 명성을 떨치게 되었으며, 수많은 사람의 발길이 오가는 명승지가 되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다른 유적들과 마찬가지로 등왕각 역시 1350여 년을 거쳐 오면서 수차례 훼손되고 중건되었다.

 

지금의 누각은 1989, 송대(宋代)의 양식을 본떠서 중건한 것으로, 강을 향하여 우뚝 서 있는 것이 장관인데, 이것이 무려 29번째였다. 현재 등왕각은 감강(竷江)과 무하(撫河)의 합류지점에 있는데, 처음에 세운 등왕각과는 불과 100미터밖에 떨어지지 않았다. 이 등왕각은 중국의 여러 문헌과 문장가들에 의해 인용되거나 소재로 사용되었다. 예로부터 등각추풍(縢閣秋風)’이라고 해서 가을 풍경이 특히 아름답기로 소문나 있다. p.254~25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