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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매죽헌(梅竹軒),성삼문(成三問), 흰 눈 속에 우뚝 선 푸른 소나무여!

미르뫼 2014. 7. 12. 00:47
 

성삼문(成三問), 흰 눈 속에 우뚝 선 푸른 소나무여!

 

 

1)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병자(丙子,1456) 6 8일 수레에 실려 형장(刑場)으로 끌려 갈 때 대여섯 살 밖에 안된

그의 딸이 따라오며 울부짖으니 그는 뒤돌아 보며

사내아이는 다 죽어도 너만은 죽지 않으리라
하고는 목이 매어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했다.

 

자식 사랑하지 않는 아비가 어디 있으며, 아비 사랑하지 않는 딸이 어디 있을까마는, 아버지가

목에 칼을 쓰고 오랏줄에 묶여 음산한 죽음의 괴기(怪氣)가 감도는 수레에 실려가는 모습을

보고 기절해버린 어머니를 뒤로하고 대여섯 살 어린 딸이 엄습하는 무서운 공포를 이겨내고

세상에서 누구보다도 더 사랑하는 아버지를 향하여 아버지하고 목 메여 울부짖으며 수레 뒤를

따라오는 모습은 상상만해도 절로 가슴이 울렁거리게 된다.   

 

그의 허벅지는 쇠꼬챙이로 뚫린지 오래고 팔도 이미 끊어진 상태였건마는 두 팔이 오랏줄에

묶이고 시뻘건 쇳조각이 배꼽 위에서 지글 지글 타는 상태에서 성삼문이 세조의 극악(極惡)

다한 모진 친국(親鞫)을 받으면서 오히려

다시 달구어 오라 나으리의 형벌이 참 독하구나 하고 형졸들 까지도 질리게 만들고 있던 그

무서운 기개도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귀염둥이 딸아이의 애절한 울부짖음을 바라만 봐야

하는 처절한 상황 앞에서 아버지 성삼문의 회한은 얼마나 컸을까? 못난 애비 때문에 역적으로

낙인 찍혀 겪어야 할 그 딸의 앞날을 미리 그려보며 어찌 눈을 감을 수 있었을까?

 

 

 

수레가 잠시 머물렀을 때 그의 종이 울면서 술을 올리니 몸을 숙여 받아 마시고 그의 충절

(忠節)을 다음과 같이 시()로 나타냈다.

식인지식의인의 食人之食衣人衣  임의 밥 임의 옷을 먹고 입으며
소지평생막유위 素志平生莫有違  일평생 먹은 마음 변할 줄이 있으랴
일사고지충의재 一死固知忠義在  이 죽음이 충과 의를 위함이기에
현릉송백몽의의 顯陵松栢夢依依  현릉(문종의 능) 푸른 송백꿈 속에서도 못잊져라


형장의 이슬로 사라지기 전 그가 읊은 이 절명시(絶命詩)에서 다시 한번 인간 성삼문의 다른 진면목을 만나게 되어 가슴이 뭉클해진다.

 

檄鼓催人命 (격고최인명) 북은 어서 목을 베라고 조급히 울리고

西風日欲斜 (서풍일욕사) 저녁해는 하늬바람 속에 기울어 가는데
黃泉無客店 (황천무객점) 저승길엔 나그네 머물 집도 없으리니
今夜宿誰家 (금야숙수가) 오늘밤은 뉘 집에 들러 자고 간단 말인가)

 

이제 홀로 가야 할 저 저승길, 그 멀고도 먼 길의 외롭고 쓸쓸하고 길고도 음산하며 고단한

걸음을 생각하며 그는 오늘 밤 잠자리를 염려하고 있다. 외롭고 쓸쓸한 저승 길, 어쩌면 가도

가도 적막한 어두움의 노중(路中)에 너무나 인간적인 모습으로 함께 그 길을 걸어가야 할

아버지 성승과 함께 많은 사람들이 마땅한 잠자리를 잡지 못하고 어느 황량하기 그지없는

들녁 같은 곳에서 저승의 하룻밤을 쉬어야 하는 것 이라고 짐작하고 있다. 어쩌면 아버지의 잠자리를 염려하는 불효자의 안타까운 심경을 이렇게 에둘러 표현한 것이었으려나하여튼

그도 보통 사람과 별 반 다를 것 없는 한 사람의 평범한 인간의 모습을 지니고 있음을 이

절명시(絶命詩)에서 적나라(赤裸裸)하게 보여주고 있다.

   
황천무객점 (黃泉無客店) 저승길엔 나그네 머물 집도 없다는데 

오늘도 우리의 심금을 울리는 절명시 한 구절을 떠 올리노라면 절로 550년 전의 어느 장면이

아련히 펼쳐진다.

 

, 지는 해를 바라보며 형장으로 끌려가는 성삼문의 쓸쓸한 그림자여

 

2) 성삼문(成三問)의 생애

 

(태종(太宗) 18 1418 - 세조(世祖) 2 1456)

 

()는 근보(槿甫) 눌옹(訥翁) ()는 매죽헌(梅竹軒)이며 본관(本貫)은 창녕(昌寧)

()는 도총관(都摠管) ()이고, 아버지와 함께 단종복위를 꾀하다 세조의 친국을 받고

죽은 사육신(死六臣)의 한 사람이다.

 

높은 의기여! 선비의 굽힘 없는 충절이여!

당시 세조를 죽이고 단종 복위를 도모하였다가 실패하여 희생당한 사육신을 비롯한 많은

사람들의 의기와 충절 앞에 우리는 고개를 숙이지 않을 수 없는 것은 세상에서 끝까지 의리와

충절을 지키고자 죽음을 불사하기란 정말 쉬운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박팽년(朴彭年), 신숙주(申叔舟), 최항(崔恒), 이개(李塏) 등과 함께 세종(世宗)이 만년(晩年)에 숙환으로 온천(溫泉)에 갈 때 항상(恒常) 배종했던 성삼문은 세종(世宗) 20년 식년문과

(式年文科)에 하위지(河緯地)와 함께 세종(世宗) 29년 문과중시(文科中試)에 장원(壯元)

함으로써 벼슬길에 나가 세종대왕의 사랑을 받았다.

 

단종(端宗) 3년 세조(世祖)가 단종(斷種)을 내쫓고 왕위(王位)에 오르자 예방승지(禮房承旨)

였던 그는 국새(國璽)를 안고 통곡 했다.

 

 

다음해 좌부승지(左副承旨)로서 아버지 승() 박팽년(朴彭年)등과 같이 단종(斷種)의 복위

(復位)를 협의(協議) 4월 명나라 사신(使臣) 송별연회석상(送別宴會席上)에서 운검(雲劒)

쥐게 된 아버지와 유응부(兪應孚)가 세조(世祖)를 죽이고 이어서 한명회(韓明澮) 권람(權擥)

정인지(鄭麟趾)등 일파(一派)를 없애기로 했으나 당일(當日) 운검(雲劒)을 들어오지 못하게

되어 후일(後日)을 기다리기로 했다. 이에 같은 모의(謀議)에 가담했던 김질(金瓆)이 성사

(成事)가 안될 것을 우려하여 밀고(密告)함으로써 이개(李塏), 하위지(河緯地), 유응부(兪應孚)

등과 함께 체포 되어 친국(親鞫)을 받고 군기감(軍器監) 앞에서 거열(居烈)의 극형(極刑)

받았다. 그의 나이 한창 나라를 위해 펄펄 날며 일 할 수 있을 아까운 서른 여덟 장년 이었다.

 

세조의 친국장에 함께 있던 신숙주를 향하여 그의 영달을 쫓아 변절하는 태도를 보고 성삼문이 호통을 치자 한가닥 양심은 남아 있었든지 안절부절 쩔쩔 매는 모습을 본 세조가 그 자리를

벗어날 것을 허락한다. 

 

전일에 너와 더불어 집현전에서 같이 당직을 설 때에 세종대왕께서 원손을 안으시고 뜰을

거닐면서 말씀하시기를 과인이 죽은 뒤에 너희들이 모름지기 이 아이를 보호하라하셨는데

그 말씀이 아직도 귀에 남아 있거늘 너는 잊었느냐? ”

 

이에 부()인 승()도 주모자(主謀者)로 극형(極刑)을 받았고 삼빙(三聘), 삼고(三顧), 삼성

(三省)의 세 동생(同生)과 맹담(孟澹), 맹년(孟年), 맹종(孟終)과 갓난아기 등 네 아들도 모두

살해(殺害) 되었다.

 

이 몸이 죽어가셔 무어시 될고허니

봉래산(蓬萊山) 제일봉에 낙낙장송(落落長松) 되야이셔

백설(白雪)이 만건곤(滿乾坤)할졔 독야청청(獨也靑靑) 하리라

병가 甁歌 63                                                                  

 

3) 전해지는 일화들    

 

(1) 삼문(?), 그 좀 별 난 이름

 

삼문(三問)이 세상에 처음 태어날 때의 일이다.
그의 조부가 역()에 밝았든지 태어날 아이의 시()를 미리 보았다
.
때가 아직 이른지라 산고(産苦)를 앓고 있는 며느리에게 좀 참았다 낳으라고 일렀다
.
그리하여 산모는 머리를 디밀고 밖으로 나오려는 아이를 발뒤꿈치로 괴고 앉아서 안간힘을

쓰며 버티었다.
한참을 그렇게 버티다 힘이 겨운 며느리가

“이제 때가 되었나이까?

하고 묻는다. 그러면
“아직 더 참아라”

하고 시아비가 이른다
그렇게 묻기를 세 번씩이나 하고 드디어 때를 맞추어 출산을 시켰다고 해서
아이의 이름을 삼문(三問)이라고 지었다고 한다

(2) 클레오파트라의 코와 성삼문의 키


프랑스의 철학자 파스칼은 클레오파트라의 코가 조금만 낮았더라면... 이라는 말을 했다.

"
나로서는 무엇인지 모르는 것 그 하찮은 것이 모든 땅덩어리를, 황후들을, 모든 군대를, 온 세계를 흔들어 움직이는 것이다. 클레오파트라의 코, 그것이 조금만 낮았더라면, 지구의

모든 표면은 변했을 것이다."

 

집현전 학사로 있던 삼문이 세종의 명을 받아 훈민정음을 만들면서 명()의 운학자(韻學者)

황찬(黃瓚)의 자문을 구하러 요동 땅을 맨 처음 밟을 때의 일이다.
삼문은 오척단구(五尺短軀)여서 그것이 마음에 걸렸든지 버선 밑에 솜을 괴어 한 치쯤 높여

신고 들어갔다.
그런데 어느 동구 앞 정자나무 밑에 이르렀는데 그늘 아래서 쉬고 있던 한 노옹(老翁)

삼문을 보더니 혀를 끌끌 찼다.
괴이히 여긴 삼문이 그 까닭을 물은 즉

“그대의 상을 보니 참 아깝기도 하다. 키가 한 치만 낮았더라면 천하문장(天下文章)이 되었을 터인데”
하더라는 것이다.

(3) 성삼문의 필력


 

 


한번은 사신으로 연경(燕京)엘 간 적이 있는데, 마침 궁중(宮中)의 한 누각(樓閣)을 중수

(重修)하고 나서 천정의 상량에 새로 상량문을 쓰고자 하는 참이었다.
임금이 사신인 성삼문을 불러 그에게 상량문을 써 주도록 청했다
.
키가 작은 삼문이 몇 개의 탁자를 괴어 놓고 그 위에 올라섰다
.
큰 붓을 들어 상량에 글씨를 심어 가는데 그 웅혼한 필체에 감탄하는 소리가 여기저기서

쏟아져 나왔다. 그러자 밑에서 탁자를 붙들고 있던 한 신하가 투기(妬忌)가 일어 그만

실수한 척하며 괸 탁자를 무너뜨리고 만다.
헌데 삼문은 땅 바닥에 떨어지질 않고 붓이 상량에 달라붙어 그 붓대를 붙든 채 공중에

대롱대롱 매달려 있었다고 한다.

(4) 감형관(監刑官)에게 남긴 유언

 

너희들은 어진 임금을 보좌하여 태평성대를 이룩하라 나는 죽어서 돌아가신 임금을

땅 밑에서 뵈리라

출처 : ▒ 한 산 草 堂 ▒
글쓴이 : 천하한량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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