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

[스크랩] (29)팔만대장경

미르뫼 2013. 11. 1. 00:10
[상생의 땅 가야산] (29)팔만대장경
5천200만자 행간마다 숨쉬는 민족혼
 
 
 
▲팔만대장경을 보관하고 있는 해인사 장경판전. 양쪽으로 길게 자리잡은 건물 중 왼쪽이 법보전, 오른쪽이 수다라장이다. 아래창과 위창의 크기가 서로 다르게 만들어져 건물 내부의 습도를 일정하게 유지하고 있다.
 
▲장경판전 안은 목재의 보존 유지에 알맞은 습도가 되도록 소금, 숯, 횟가루, 모래를 차례로 놓은 흙바닥을 만들었다.
 
▲한 글자를 새길 때마다 세 번 절하는 정성으로 만든 팔만대장경 경판.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명필인 추사(秋史) 김정희(金正喜). 전국 곳곳 사찰에서 추사의 글씨가 적힌 현판을 볼 수 있지만 해인사에서는 그의 글씨로 된 현판을 찾아볼 수 없다. 해인사와 인연이 닿지 않아서가 아니었다. 추사의 부친인 김노경이 경상도 관찰사로 있을 때 해인사를 중창하게 되는데 이때 김노경은 추사로 하여금 해인사 대적광전 건립을 위한 권선문(勸善文: 시주를 권하는 글)과 건물의 상량문(上樑門)을 짓게 했다. 감색비단에 금니(金泥: 아교에 갠 금박 가루)로 쓴 추사의 상량문이 해인사에 보관돼 있다.

해인사에 추사의 글씨로 된 현판이 없는 것은 팔만대장경 때문이다. 추사는 경판의 글씨를 보고 "이는 사람이 쓴 것이 아니라 마치 신선이 내려와서 쓴 것 같다."고 찬탄하며 해인사에는 현판으로 쓰기 위한 글씨를 남기지 않은 것이다.

#민족의 혼이 담긴 팔만대장경!

해인사가 법보종찰(法寶宗刹)이 된 것은 팔만대장경(八萬大藏經)을 봉안하고 있어서다. 불보(佛寶)사찰인 통도사, 승보(僧寶)사찰인 송광사와 더불어 해인사는 우리나라 3보사찰로 꼽힌다. 8만 2천여 판에 달하는 이 장경판에는 부처의 가르침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5천200만 자의 구양순체 글자들은 한결같이 꼴이 아름답고, 일정하기 그지 없다. 한 글자를 새길 때마다 세 번 절하는 정성으로 만든 팔만대장경엔 우리 민족의 혼이 오롯이 녹아들어 있다. 세계 최고의 역사를 가진 대장경은 민족의 보배(국보 제32호)이며, 세계문화유산으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잘 알다시피 팔만대장경은 몽골의 침입을 불법(佛法)의 힘으로 막아보고자 하는 뜻에서 만들어졌다. 1236년부터 1251년까지 꼬박 15년이 걸린 대역사였다. 경판의 크기는 가로 70cm, 세로 24cm 내외다. 두께는 2.6~4cm이며 무게는 3~4kg.

경판을 만드는 데엔 주로 산벚·돌배나무가 쓰였다. 짧게는 30년, 길게는 40~50년생 나무 중 굵기가 40cm 이상이고, 옹이가 없는 나무가 경판재로 선택됐다. 나무를 벌채한 후 얼마간(1, 2년)은 현장에 통나무 상태로 눕혀뒀을 가능성이 높다. 꼿꼿하게 서 있을 때의 생장응력(生長應力)을 없애기 위해서다. 응력을 제거해야 건조할 때의 갈라짐과 비틀어짐을 막을 수 있다.

나무를 켜서 판자를 만든 다음에는 소금물에 삶아 말렸다. 경판이 뒤틀리지 않고, 글자를 조각하기 쉽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또 벌레 알들이 경판을 새긴 후 애벌레가 되어 경판을 파먹는 일이 없도록 소금물에 삶은 것이다. 건조시키기, 판자다듬기 과정을 거친 후에야 경판에 경을 새기는 작업을 시작했다. 정밀하게 교정해둔 판하본(板下本)을 경판 위에 고루 풀칠하고 붙였다. 경판을 새기기 직전에 식물성 기름을 얇게 바르고, 경판을 새겼다. 장인 한 사람이 하루에 30~50자를 새기는 말 그대로 ‘혼을 불어넣는’ 인고의 작업이었다. 경판 한 장에 새겨진 글씨는 앞뒤를 합쳐 약 640자다. 한글, 김치, 태권도와 더불어 팔만대장경은 우리나라가 자랑스럽게 세계에 내세울 수 있는 문화유산이다.

#신비로운 장경판전!

팔만대장경판이 해인사로 옮겨진 것은 조선 태조 7년(1398년). 이 무렵 대장경판을 보관하기 위해 장경판전을 만들었다. 그후 수차례 중수를 거쳤다. 해인사에 남아 있는 건물 중 가장 오래된 것이 장경판전이다.

해인사 주법당인 대적광전 뒤편에 장경판전은 자리잡고 있다. 경내의 맨 뒤쪽 가장 높은 곳에 입지한 것은 그만큼 장경판전이 중요하다는 뜻이다. 장경판전 마당에서 볼 때 바깥 쪽에 해당하는 앞 건물은 수다라장, 뒤에 있는 건물은 법보전이다. 가야산 중턱에 해당되는 약 655m의 높이에 서남향으로 앉았다. 주변 지형은 북쪽이 높고 막혀 있으며, 남쪽 아래로는 열려 있다. 남쪽 아래에서 북쪽으로 불어 올라오는 바람이 자연스럽게 판전 건물을 비스듬히 스쳐 지나가게 되어 있다. 홍류동 계곡에서 불어온 공기의 습도가 어느 정도 떨어지는 곳이기도 하다.

수다라장과 법보전 두 건물의 각 벽면에는 위아래로 두 개의 창이 이중으로 나 있다. 흥미로운 것은 아래창과 위창의 크기가 서로 다르다는 것이다. 건물의 앞면 창은 위가 작고 아래가 크며, 뒷면 창은 아래가 작고 위가 크다. 큰 창을 통해 건조한 공기가 건물 안으로 흘러들어오게 함과 동시에 가능한 한 그 공기가 골고루 퍼진 후에 밖으로 빠져나가도록 하기 위해서다. 소금, 숯, 횟가루, 모래를 차례로 놓은 판전 내부 흙바닥은 습기가 많을 때는 머금고, 습기가 없을 때는 내보내 목재 보전 유지에 알맞은 습도를 유지하도록 되어 있다. 경판의 변형을 줄일 뿐만 아니라 해충의 침입까지 막을 수 있도록 했다.

판전이 서 있는 곳은 삼재(三災: 풍재 수재 화재)가 들지 않는 터에 해당된다. 해인사가 창건된 이후 전역이 전소될 만큼의 큰 화재만 9차례가 났지만 판전이 위치한 곳까지는 화기가 미치지 않았다.

장경판전은 신비로운 모습을 많이 간직하고 있다. 판전 지붕 밑에는 거미줄이 쳐지지 않는다. 또 판전 내부로는 벌레들이 침입하지 못하며 지붕 위에는 새가 앉지 않는다는 등 신기한 일이 적지 않다는 얘기다. 그리고 수다라장 입구에는 일 년에 딱 두 번 연꽃무늬 그림자가 생기는데, 절기 중에 봄과 가을을 알리는 춘분과 추분 이 두 날에만 그림자가 생긴다는 것이다. 두 개의 장경판전 그리고 고려각판을 보관하고 있는 동·서 사간판전 등 네 개 건물의 기둥 수를 모두 세면 108개가 된다. 팔만대장경과 함께 장경판전도 국보이며,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돼 있다.

 

글·이대현기자 sky@msnet.co.kr / 박용우기자 ywpark@msnet.co.kr 사진·박노익기자 noik@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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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8년 01월 28일 -
출처 : 삶과 자연 그리고 문학
글쓴이 : 메아리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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