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관

[스크랩] 한민족,5천년 문화의 진수

미르뫼 2013. 11. 1. 00:23

5천년 문화예술의 진수

 

한민족의 성품이 그려낸 오묘한 선의 흐름과 훈훈한 정감...

 

장황한 수식어나 예찬이 필요하다면,작품이 아직 어설프기 때문일 것이다.

자연의 극치에 다다른 작품이라면 덛붙임은 물론 어떠한 말도 필요치가 않다.

한민족의 예술작품은 기예가 아닌 일상생활로서,자연과 조화하는 무위도행이었다.

 

한민족의 고운 심성과 빼어난 미감은 우리의 정신문화에 품격을 한층 높여주고 있다.

 

 

반가사유상(金銅半跏思惟像)

 

국보78호,국보83호, 금동미륵보살반가사유상(金銅彌勒菩薩半跏思惟像)

 

흐르는 미소,살아 움직이듯...                                         고요 뒤에는 숨은 생명력이...

 

   

반가사유상(백제,7세기 초반) 국보83호                        반가사유상(백제,6세기 후반) 국보78호 

 

국립중앙박물관을 대표하는 걸작 중의 걸작이다. 완벽에 가까운 조형과 철학적,종교적 깊이로 동양미술사의 기념비적 작품이라 평가받는다.

 

미술사가 최순우는 이 불상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슬픈 얼굴인가 하고 보면 그리 슬픈 것 같이 보이지도 않고,미소짓고 계신가 바라보면 준엄한 기운이 입가에 간신히 흐르는 미소를 누르고 있어서 형언할 수 없는 거룩함을 뼈저리게 해준다."

 

박물관의 유물설명도 이례적으로 시적(詩的)이다.

“입가에 머금은 생기있는 미소,살아 숨쉬는 듯한 얼굴 표정,부드럽고 유려한 옷주름,상체와 하체의 완벽한 조화,손과 발의 섬세하고 미묘한 움직임...모든 것들이 이상적으로 표현됐다.”

 

높이 90.9㎝의 이 금동불(국보83호)은 오른쪽 다리를 왼쪽 다리에 걸치고(반가,半跏) 오른 무릎위에 올려놓은 오른팔로 턱을 괸채 깊은 생각(사유,思惟)에 잠겨있다. 일본의 국보1호인 교토 코류지(廣隆寺)의 목조 반가사유상과 꼭닮아 고대 한국문화의 일본전파를 입증하는 유물로 여겨져 왔다.

 

국보78호인 다른 반가사유상과 쌍벽을 이루고 있으나 좀더 해맑은 미소와 꾸밈없는 소박함,입체적 조형이라는 "작은 차이"가 이 불상을 먼저 손꼽게 했다.

 

  

반가사유상(金銅半跏思惟像) 국보83호(7세기초)               반가사유상(金銅半跏思惟像) 국보78호(6세기 후반)

 

살포시 눈을 감고 깊은 철학적 명상에 빠진 모습이 국보83호 반가사유상과 닮았지만, 그 표정은 훨씬 성숙해 보이면서 깨달음의 경지에 가까이 다가간 느낌을 준다.

 

태양과 초승달을 결합한 장식이 솟아있는 화려한 보관(寶冠), 가느다란 듯 힘이 넘치는 신체의 곡선, 천의(天衣) 자락과 허리띠의 율동적인 흐름, 높이가 82.9㎝나 되는데도 두께를 2~4㎜로 유지한 고도의 주조 기술...

 

미술사학자 강우방은,

“언뜻 고요해 보이지만 위대한 보살 정신의 생명력을 역동적으로 표현한 기념비적 작품"이라고 말했다.

 

[펌,편집]조선일보 (글:鄭淳台 月刊朝鮮 편집위원, 사진:趙明東 寫協홍보분과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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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동불입상

 

단순,순수,소박이 표출해낸 최고의 신비감...품에 안고 싶은 감정이 솟구친다.

 

연가칠년명,금동불입상(延嘉七年銘金銅佛立像),국보119호(고구려,539년)

 

우리나라 불상의 역사를 이야기할 때 항상 맨 첫장을 장식하는 국보119호 '연가7년명 금동여래입상'(延嘉七年銘 金銅如來立像,국립중앙박물관)은 우리나라 최고(最古)의 불상이다.

 

살포시 고개숙인 갸름한 얼굴, 두꺼운 질감을 연상케 하는 가사, 양어깨를 감싸며 갈퀴처럼 날카롭게 뻗어내린 옷자락, 옷자락 사이로 드러난 양손, 오른손은 '두려워말라'의 시무외인,왼손은 '무엇을 원하느냐'의 여원인, 화염처럼 위로 타오르는 광배, 도톰하고 탄력있는 연꽃장식의 원형대좌 등..,

 

이 일련의 수식어들은 연가7년명 금동여래입상을 바라본 시각언어의 나열이다. 금빛 찬연한 이 불상은 광배,연화좌와 함께 주조된 작품으로,광배 뒷면에는 한자 명문이 음각으로 새겨져 있다.

 

높이16.2㎝의 이 조각품을 바라보고 있노라면 몇가지 의문이 생긴다. 이 부처님은 경주에서 만날 수 있는 통일신라 조각처럼 탄력있는 몸매의 실루엣을 드러내지 않고,두꺼운 겨울외투를 입은 듯하다. 게다가 옷자락은 왜 갈퀴처럼 날카롭게 뻗어 있을까? 광배의 형태나 새겨진 문양은 왜 한결같이 화염처럼 위로 뻗어 있으며,탄력있는 연꽃대좌는 무슨 역할을 할까? 이런 의문과 일련의 조형감각이 한데 어우러져 이 불상을 더욱 신비스런 분위기로 감싸게 하는 듯하다.

 

 

어떻게 전해졌든, 연가7년명 금동여래입상은 고구려 불교가 남하한 실증적 증표로써 많은 이야기를 담고 평양과 의령,남과 북을 잇는 매개자로 관람객을 맞이하고 있다.

 

[펌,편집] 토함산 솔이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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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회양반탈,하회각시탈

 

파안,순수,소탈....탈에서 우리네 삶이 다 묻어나는데...,무슨 말이 더 필요하랴...!


 

 

하회양반탈,국보121호                                                   하회각시탈,국보121호

 

 

양반탈 -하회탈중에서 대표적인 가면 미술의 극치라는 평을 받고 있으며 대체적으로 부드러운 표정이다.

"양반은 냉수 마시고서도 이빨 쑤신다"는 말처럼 허풍스러움과 여유스러운 표정이 복합되어 있다. 턱을 분리하여 끈으로 매달아 놓음으로서,고개를 젖히면 박장대소하는 표정이 되고,고개를 숙이면 입을 다문 화난 표정으로 변한다. 놀이마당에서는 부네와 소불알을 두고 선비와 지체다툼이나 학식다툼을 벌이다가 망신당하는 인물이다.

 

<춤사위: 양반걸음 팔자걸음> 주황색 바탕에 머리와 눈썹은 검고,눈구석 언저리와 양 볼에 가느다란 주름살이 잡혀 웃는 표정을 나타내고 있다. 코는 매부리코로 콧날개가 벌어진 큰 코이며,강한 인상이다. 턱은 따로 연달아서 움직인다

각시탈 -대체로 조용하고 차분한 표정이나 입은 힘을 주어 꾹 다물고 있다. 이는 새색시 시집살이의 어려움을 속으로 삭이는 표정으로 볼 수 있다. 왼쪽으로 땋아내린 머리채는 앞으로, 오른쪽 머리채는 뒤로 빠진 것으로 보아 걸을 때는 얼굴의 움직임은 없고 머리채만 덜렁거리는 얌전한 형상으로 볼 수 있다. 놀이마당에서는 서낭신의 넋으로서 걸립읍을 하는 한편, 혼례와 신방마당에서 모의적인 혼례 및 성행위를 함으로써 풍요다산의 주술성을 획득해 주는 인물이다. 사회적 제약으로 인한 강요된 침묵과 부자유스런 수줍음이 깃들어 있다.

 

<춤사위 : 사뿐사뿐 각시걸음> 머리를 조각하여 `ㅡ’ 자로 큰 머리를 얹었고 눈썹은 검게 했으며 연지 곤지 찍은 흔적이 있고, 입술은 붉게 칠했다.  [펌]다음,신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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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동대향로

 

봉황이 날아오를듯 하구나

 

백제 금동대향로(百濟金銅大香爐) 국보287호,-백제 6~7세기

 

1993년 12월 12일, 충남 부여 능산리 절터의 물구덩이에서 이 엄청난 유물이 모습을 드러냈을 때 세상이 다 놀랐다.

 

당시 이규태 조선일보 논설고문은 “동서고금에 이보다 더 정교하고 섬세한 향로는 없을 것”이라고 썼다.

 

높이 61.8㎝나 되는 큰 향로는 유례가 없는데다, 첩첩산중에 촘촘히 표현된 74개의 산봉우리, 6그루의 나무, 12곳의 바위...

 

봉황, 용, 호랑이, 사슴 등 39마리의 동물, 산 중턱에 있는 산길, 산 사이로 흐르는 시냇물, 폭포, 호수,피리와 소비파, 현금, 북들을 연주하는 5인의 악사와 각종 무인상, 기마수렵상 등 변화무쌍하게 표현되어 있는 16명의 인물상이 보는 이의 넋을 빼앗았다.

 

그저 멀리서 지켜만 봐도 이 향로는 감탄과 흥분을 불러일으킨다. 받침에선 다리 하나를 치켜들고 있는 용이 갓 피어나는 연꽃 봉오리를 입으로 받치면서 우아한 곡선을 만들어내고, 그 위 신산(神山) 꼭대기에는 봉황 한마리가 날개를 활짝 펴고 서 있다.

 

연꽃에 담긴 불교사상과 삼라만상을 음양의 조화로 구현한 도교사상을 함께 표현한 이 명품은, 아마도 백제 멸망 당시 누군가 급하게 땅속에 파묻은 것으로 추정된다.

 

[펌]조선일보 봉황이 날아오를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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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비로운 청자

 

 

청자상감모란문표형병,국보116호                                     청자음각연당초문장경병(靑磁陰刻蓮唐草文長頸甁)

 

청자상감운학문매병(靑磁象嵌雲鶴文梅甁),국보68호               청자과형병(靑磁瓜形甁),국보94호

 

오묘한 선,간결 시원한 형상,비색으로 조화된 자연스러운 경지,비색청자....멍하니 할 말을 잃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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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금문화의 찬란한 빛

 

자연스러운 선과 예리한 곡선을 교묘히 배합하여 생기와 활력을 창조하는 금제 신품들...

 

 

금제뒤꽂이(왕),국보159호            금제관식(왕),국보154호

 

천마총금제접형관식,보물617호,     천마총금제관모(冠帽),국보189호   천마총금제조익형,보물618호 관식

 

 

  

금관및수하식(98호북분),국보191호                       천마총금관(天馬塚金冠) 높이32.5Cm,국보188호

 

황남대총 금관 金冠 국보191호(신라,5세기)

 

신라 ‘황금 문화’를 말해주는 데 금관만한 유물은 없을 것이다.  힘과 권위를 상징하는 그 화려함 때문일까. 함께 출토된 금제 허리띠와 함께 새 박물관 ‘독방’에서 전시된다. 나뭇가지 모양과 사슴뿔 모양의 세움장식이 잘 드러난 신라 금관의 ‘표준형’. 곱은옥과 달개 같은 장식품도 호화로운데, 바람이 불면 달개가 움직이면서 햇빛을 받아 찬연한 빛을 발하게 된다. 그렇다면 신라의 왕들은 정말로 이 금관을 썼을까? 실용품·장례용·의례용이라는 세 가지 설이 있지만 아직 의문은 남아 있다. 또 하나의 미스터리는 이 금관의 주인이 여성이었다는 것. 어느 왕비의 무덤으로 알려진 황남대총 ‘북분’에서 나왔다. 반면 왕의 무덤 ‘남분’엔 금관이 없었다.     ⓒ조선일보 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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까치호랑이

 

무섭고 두려운 호랑이가 오히려 다정한 표정으로 반기고 있는 까닭은...

 

4200년전 중국고서 산해경(山海經,해외동경,海外東經)에 다음과 같은 귀절이 있다.

 

東海之內 北海之隅 有國 名曰朝鮮 天毒其人水居 偎人愛之

동해지내 북해지우 유국 명왈조선 천독기인수거 외인애지

 

동해 안쪽,북해주변에 조선나라가 있다. 하늘이 보살펴 물가에 살고,남을 가까이하며 보살핀다.

 

君子國在其北 衣冠帶劍 食獸 使二大虎在旁 其人好讓不爭 有薰華草 朝生夕死

군자국재기북 의관대검 식수 사이대호재방 기인호양부잭 유근화초 조생석사

 

군자국이 북쪽에 있는데,의관에 띠 두르고 칼을 찬다. 가축도 기른다. 큰 호랑이 두마리를 곁에 두고 마음대로 부린다. 그 사람들은 양보를 좋아하여 서로 다투지 않는다. 무궁화가 있어 아침에 피었다가 저녁에 진다.

 

    

 

 

  

 

 

절에 가면 뒤쪽 높은 곳에 산신각이 있는데,흰수염에 지팡이든 신선이 호랑이를 타고앉아 호랑이를 부리는 신선도가 있다.

 

먼옛날,우리 선조 어르신 중에서 도가 높아 신선이 되신 분들은 호랑이를 기르며 부린다는 사실을 산해경이 4천년 전에 전해주고 있는 것이다. 요사이 호랑이를 요령껏 다루는 전문조련사처럼,우리 선조들은 이미 호랑이를  곁에 두고 거느리셨던 것이다.

 

우리 한민족에게 있어 호랑이는 영물이며,우리를 지켜주는 수호신이었다. 얼마전까지만 해도 호랑이를 친근하게 여기며,집집마다 까치호랑이 민화를 직접 그려 방이나 대문에 붙이던 풍습이 그것이다.

 

그토록 신령스러운 호랑이기에,우리 민화에서 까치호랑이는 무섭기는 커녕 오히려 친근하게 묘한 표정을 짓고있는 것이다. 천하만물이 모두 자연의 일부로서,뭇사람을 가까이하고,뭇짐승도 모두 가까이 두고 서로 보살피며 공존하는 우리민족의 심성을 까치호랑이에서 확인할 수 있는 것이다.

 

 

 

 

호랑이를 거느린 신선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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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묘도추(野描盜雛)

 

파적도(破寂圖),긍재 김득신(金得臣,1754-1822) 조선시대,간송미술관소장

 

 

그저 웃음이 절로 나온다.

 

꽃이 핀 봄날,부부는 마루에서 한가로이 돗자리를 짜고,암탉과 병아리들은 모이를 쪼며 평화롭게 마당을 노닐고 있었다. 어디서 나타났는지 도둑고양이 한마리가 재빠르게 어린 병아리 한마리를 입에 물고 달아나면서,오붓하던 집안의 평화가 깨지고 만다.

 

영감님이 버선발로 엎어지며 몸을 날려 담뱃대로 고양이를 잡아보려 하지만, 머리에 쓴 망건만 날아가고 돗자리짜던 틀마저 넘어져버리고, 겁에 질린 병아리들은 달아나기에 바뻐 곤두박질을 치고...

 

부인도 깜짝 놀라 맨발로 나서보지만,그까짓 병아리 걱정보다야 엎어지는 내 서방님이 행여 다칠쎄라 마음만 더 조급하다. 암탉이 사납게 대들어 보지만 고양이는 모른 체 영감님 돌아보며 어디 나잡아보라는 듯 여유까지 부리고....

 

인물풍속화를 즐기던 김득신은 해학 넘치는 순간포착으로 이야기를 한줄기 엮어내면서 그림에 생명력을 부여하고 있다. 이렇듯 재치있는 모습을 통해 당시의 시대상을 어렴풋이나마 엿보고,옛 조상들의 정서도 함께 맛볼 수 있게 해주니 얼마나 좋은가?

 

어느 봄날,농가 마당에서 벌어지는 어수선한 풍경에 잠시나마 세상사를 잊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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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료모음

 

세계미술사의 걸작품, 그 오묘한 미소

 

[국보 제83호] 금동미륵보살반가사유상                [국보 제78호] 金銅彌勒菩薩半跏思惟像

    

[펌](글:鄭淳台 月刊朝鮮 편집위원, 사진:趙明東 寫協홍보분과위원장)

 

 

 

 

 

          '일본 국보 1호'도 한국의 작품

 


국보83호(백제 7세기초)                                   일본 국보1호 <고류사> 미륵보살 반가사유상

 

'존 카터 코벨(미국 동양미술사 교수)이 본 일본 고류사 불상'

'목조미륵반가사유상'이 안치된 광륭사(廣隆寺,고류사)는 603년 한국에서 이주해 온 직물기술자 진하승(秦何勝)이 건립한 절이다.

 

그는 한국계 혈통을 지닌 '쇼토쿠 태자'와 절친한 사이였다.  쇼토쿠 태자가 48세에 홍역으로 급사하자,하타노는 자신이 세운 절인 고류사에 자신이 존경했던 쇼토쿠태자를 기리려는 미륵보살상을 신라에 요청했다. 신라의 장인은 시일이 촉박하여 청동으로 주조하는 대신 적송 통나무 하나에서 걸작 미륵보살상을 깎아내고 그 위에 금을 입혔고,그 불상이 '목조미륵반가사유상'이다.

 

봄에 서거한 태자를 기린 금부처가 7월(623년)에 도착했다는 일본서기의 기록을 통해서 불상의 일본 도착시기도 알 수 있다.”  -‘한국문화의 뿌리를 찾아’-

 

광륭사 미륵보살반가사유상

 

  반가사유상은 원래 석가모니가 태자시절에 인생무상을 느껴 고뇌하는 명상자세에서 기원하며,출가 이전의 이러한 태자모습은 중생제도를 기다리는 미륵보살 모습과 비슷하므로 미륵보살상도 '반가사유'의 모습으로 조성되었다.

 

실존철학자인 독일의 야스퍼스(1883-1969)는 이 불상을 찬찬히 살펴본 뒤에 크게 감동한 나머지 절찬을 아끼지 않았다. "이 불상이야말로 고대 그리스나 고대 로마의 그 어떤 조각 예술품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매우 뛰어난, 감히 인간이 만들 수 없는 살아있는 예술미의 극치이다."

  

이 불상이 신라로부터 일본에 전해진 것은 7세기초이다. 이와 같은 사실은 일본의 고대기록에 전해지는 동시에 현대의 일본 고대사학자들이나,미술사가들이 한결같이 입증하고 있다.

 

그런데 한가지 덧붙인다면,일부 학자가 이 불상이 "신라"에서 온 것이 아니고,백제에서 온 것이라고 주장하기도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서울 국립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는 "금동미륵보살반가상(국보 제83호,90Cm)"이 바로 고류사의 목조 신라불상과 똑같은 형태의 양식을 보여주고 있다는 것은 일본학자들도 한결같이 증언하고 있다.

 

다만 한국의 금동미륵보살반가사유상은 신라의 것으로 알려져 있었다가 백제의 것이라는 주장이 제기 되어 현재는 삼국시대의 것으로만 되어있다.

 

  일본 학자들은 광륭사의 이 신라 목조 불상이 일본 고대 다른 불상에서는 전혀 찾아볼 수 없는 적송(赤松)으로 만든 불상이라는 것을 지적하고 있다. 이 적송은 일명 춘양목이라고 부르는 나무이다. 즉 적송으로 조각한 것은 한국 목조불상의 특징인 것이다. [펌]'일본 국보 1호'도 한국의 작품

 

국보83호 금동반가사유상과 일본국보1호 목조반가사유상(우,한국산 적송)의 비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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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바른사회
글쓴이 : 알마자야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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